흐르는 길

                                                                                               김형진

 산기슭을 따라 흐르는 찻길. 왼편에는 비스듬한 다랑 밭들이 굽이굽이 이어지고, 오른편에는 널찍한 논배미들이 질펀히 깔려 있다. 산골치고는 제법인 들판에 누렇게 익은 곡식들이 넉넉하다. 그 들판에선 농부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버스 안엔 낡은 유행가 가락이 나직이 흐른다. 유행가 가락에 취한 버스는 바쁠 것이 없다. 승객이라야 나를 포함해 모두 다섯 사람. 곧장 내달리는 고속도로가 아닌 지방도로를 쉬엄쉬엄 달리는 한가로움이 편안하다. 비어 있는 좌석이 너무 많아 차 안이 냉랭한데도 운전기사는 여유 있게 유행가 가락을 따라 부른다.

이전에도 시외에 나와 산과 들과 강을 볼 때면 시야가 트이는 듯한 시원함을 느끼곤 해왔다. 그럴 때면 그저 일상으로부터 잠시 탈출한 데서 오는 기쁨이려니 치부해 버렸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가을빛이 완연한 산과 풍요가 넘치는 들과 냇물처럼 굽이굽이 흐르는 길이 내게 한없는 편안함을 안겨준다.

얼마 동안이나 졸았을까. 버스가 멈추는 바람에 깨어 보니 소읍(小邑)이다. 아직도 시골티를 벗지 못한 상점들이 정답다. 승객 한 사람이 내리고 그 뒤를 따라 운전기사마저 내린다. 유행가는 그대로 틀어둔 채로다. 갓난아이를 안은 아낙 한 사람이 버스에 오른다. 오른 팔로는 어린애를 안고 왼손에는 기저귀 가방을 들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여인에게서 비릿한 젖 냄새가 난다.

한적한 소읍의 오후는 나른하기만 하다. 어디서 힘찬 장닭의 울음소리라도 들렸으면 좋으련만. 다시 졸음이 몰려오려는 참에 운전기사가 차에 오른다. 어디서 막걸리라도 한 사발 들이킨 걸까. 순한 눈매로 승객들을 둘러보며 입을 헤벌리고 웃음을 짓는다.

“이제 다시 가 볼까요.”

다시 출발한 버스는 소읍을 벗어나자 곧바로 산비탈을 기어오른다. 차가 오를수록 찻길 오른쪽의 논배미가 차츰 좁아진다. 세 배미가 두 배미가 되고, 두 배미가 한 배미가 되고, 한 배미마저 꼭지각을 좁혀가더니 나중에는 냇물 흐르는 계곡이 되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선 그 계곡마저 잡목에 덮여 버린다.

왼쪽의 다랑 밭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이제는 협곡을 타고 오르는 구불구불한 길. 차는 길고 짧은 곡선을 그리며 느긋하게 달린다. 차 안에는 여전히 세 박자의 유행가 가락이 나직이 깔리고… 무르익은 가을 산에서도 나무와 풀과 꽃들이 세 박자 유행가 가락에 취해 흐드러진다. 불그죽죽한 줄기를 뽐내고 선 소나무와 이제 막 화려한 치장을 마치고 나온 단풍나무와 떡갈나무와 이름 모를 잡목… 그리고 나무들 사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 얼크러진 칡넝쿨과 무더기 무더기 피어 있는 산국(山菊)과 일렬 종대로 서서 일제히 땅을 향해 머리를 떨구고 있는 띠풀과… 산은 살아 있는 것들의 신비로 가득하다.

눈을 드니 비스듬한 능선 위로 하늘이 환히 열린다. 비취빛 가을 하늘에 몇 무리 새털구름이 떠 있다. 하늘빛과 새털구름의 조화에 넋을 잃고 있는데 뒤에서 까르르 아기 웃음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젊은 아낙의 무릎에 선 아기가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고 있다. 엄마는 아기의 겨드랑이를 잡고 아기를 얼리고 있고, 아기는 또 한바탕 까르르 웃는다. 그 웃음소리가 이 산정의 자연 속에 남김없이 녹아든다.

차는 숨을 헐떡이며 느릿느릿 산정을 넘는다. 그래도 올라온 고개의 경사가 제법이었나 보다. 차는 한동안 부르릉거림도 없이 미끄러져 내린다. 계곡을 벗어나 논과 밭이 열리고 조금 뒤에는 옛 나루터였음직한 작은 마을에 이른다. 어구에 자리잡은 아름드리 당산나무가 시선을 붙잡는다.

차가 잠시 멈추더니 차양 넓은 모자를 둘러쓴 중년 여인이 빨간 고추가 가득 담긴 마대(麻袋)를 안고 차에 오른다. 이곳은 손님만 태우고 가는 곳인지 차는 이내 출발한다. 내가 앉은 옆 줄, 중앙 통로 건너편에 앉은 여인의 옆얼굴이 검붉다. 그러면서도 싱싱한 소나무 표피처럼 생기가 흐른다.

“고추는 뭣 할라도 갖고 가요?”

운전기사가 스스럼없이 말을 건다. 여인은 운전기사의 뒷모습을 흘끔 보고 나서 천연스럽게 응대한다.

“농사 지었응게 나눠 먹어야 안 쓰겄소. 대처(大處) 사는 작은집에 쪼곰 갖고 가요.”

“그렇고롬 죄 나누면 남는 것이나 있겄소.”

“그리도 어쩔 것이요. 사는 것은 험해도 이 재미로 농사 짓는디.”

“허기사 그것이 사람 사는 맛이기는 하지라우. 허허허…….”

운전기사의 웃음이 여운을 남긴다. 이제 유심히 보니 운전기사의 뒷모습에도 수더분한 농부의 모습이 남아 있다.

짤막한 시멘트 다리를 건넌 차는 낮은 강둑을 타고 달리기 시작한다. 연한 녹색을 띤 강물에 내가 타고 가는 자동차가 비친다. 길은 강을 따라 이어지고 자동차는 물을 따라 흐른다. 강물을 따라 흐르는 길에는 서두름도 멈춤도 없다. 그리고 사람살이의 고달픔도 없는 듯하다.

자동차 안에는 여전히 나직한 유행가 가락이 흐르고 있다. 승객들은 모두 조용하다. 여직도 농부의 티를 벗지 못하고 살아가는 운전기사가 몰고 가는 버스가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유유히 흘러간다. 나는 기계가 끄는 자동차가 아닌, 아직도 농부 티를 벗지 못하고 살아가는 저 운전기사가 산과 들과 구름과 강물의 힘을 빌어 끌고 가는 수레를 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수레는 영원히 멈추지 않는 마력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믿어본다.

그러나 강물이 끝나는 곳에 광주 10㎞가 선명한 표지판이 보이더니 길이 갑자기 넓어진다. 편도 2차선 차도를 쏜살같이 달리는 승용차 사이를 내가 탄 버스는 허위허위 가고 있다. 참으로 숨가쁜 행진 속이다. 힘겨운 일상(日常)이 다시 가슴을 짓눌러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