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할 만한 사람

                                                                                                李根三

 1993년에 나온 『역사상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의 순위』라는 책에서 저자인 마이켈 하트는 셰익스피어는 본래 존재하지 않은 가공 인물이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주옥 같은 작품을 쓴 사람은 에드워드 드베레(Edward de Vere)라고 못박았다. 이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 오랜 세월 있지도 않았던 사람을 붙들고 그의 생애가 어떻고 인물이 어떻고 하며 공염불을 드리고 있던 셈이다.

특히 우리처럼 셰익스피어에 심취해 대학서 오랫동안 강의를 했고, 작품도 번역했고, 극작하면서 그의 흉내를 내온 사람들은 한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내 책상 모퉁이에 자리잡았던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는 나를 비웃고 있는 꼴이 된다. 셰익스피어는 물론 내가 존경하던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 인물이 사실은 이 세상에 태어난 적도 없다니 어이가 없다.

셰익스피어의 실존론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논의가 있었다. 부정론을 편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예를 들어 그의 실존을 의심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분히 납득할 만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은 작가가 실존 인물이건 실종 인물이건 작품이 있다는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마이켈 하트는 강하게 자신 있게 작가의 실존설을 부인했다.

평소 존경하던 인물에 흠집이 나면 우리는 당황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사람들은 거실 벽에서 그의 사진을 떼어서 감추기에 혼이 났다. 존경하던 인물이 순간적으로 기피 인물로 돌변했다. 특히 우리처럼 정치가 순탄치 않은 나라에서는 이런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일제 시대에 우리 동네에 관청에서 일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집 아들이 나의 친구라 놀러가면 거실에 ‘히틀러’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이북이 공산당 세상이 되자, 그 거실에는 새파랗게 젊은 김일성의 사진이 붙었다. 이 사람도 1·4 후퇴 때 월남했는데 이번에는 그 집에 이승만 씨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 사람의 경우는 누구를 진짜 존경해서 사진을 걸어놓는 게 아니라 순전히 신분 보장용으로 사진을 이용했는지 모른다.

내가 일생 해온 일은 희곡(戱曲)을 읽고 연극사며 이론을 연구했고, 극작에도 열심히 손을 대온 일이다. 따라서 나의 머리에는 유명한 극작가며 연극 학자들의 모습이 꽉 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학교 때부터 톨스토이(Leo Tolstoy)를 좋아했다. 물론 톨스토이도 희곡을 몇 편 썼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소설의 거장이다. 독서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부터 톨스토이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가가 되었다. 오죽 그를 좋아했으면 6·25 동란 때 장교 생활을 하면서도 역시 그를 좋아하는 선배와 영문, 일문 번역서를 바탕으로 그의 『전쟁과 평화』를 완역했을까. 지금도 헌책방에서 여섯 권으로 된 그 책이 보이면 당시의 나의 만용에 낯이 뜨거워진다. 물론 나는 그때 가명을 사용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문(文)은 곧 인(人)이라고 배워왔다. 내가 톨스토이를 좋아하고 존경한 것도 그런 말을 믿어왔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위대한 예술가일 뿐만이 아니라 인간애(人間愛), 그리고 휴머니티를 지상에 실현하기 위해 몸을 바친 인물이라고 배워왔다. 그간 그에 관한 숱한 책에도 이런 사실을 강조해 왔다. 가난한 사람들의 실정을 알고 몸소 그들의 고통을 체험하기 위해 말년에 그는 80 노구를 이끌고 집을 나와 방황하다 어떤 시골 기차 정거장 벤치에서 동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위대한 인물의 죽음은 역시 감격적이며 우리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그런데 최근 그의 일생을 추궁한 한 학자의 책을 보니 톨스토이는 휴머니티를 외치면서도 그의 가족, 특히 부인에 대해서는 무관심을 넘어 폭군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의 말년의 참사도 휴머니티와는 관계없이 부인이 미워 그 전에 썼던 유서(遺書)를 수정, 부인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기로 했는데 이 사실을 부인한테 들켜 대판 싸움을 하고 가출했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기찻간에서 발병하여 부득이 도중에 내렸는데, 이 소식을 듣고 부인이 달려갔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세상을 하직했다. 폴 존슨(Paul Johnson)은 그의 저서에서 젊었을 때부터 투전, 외도에 미쳐 재산을 탕진하고 가족을 학대한 톨스토이의 행적을 이잡듯 샅샅이 기록하고 있다.

중동의 어떤 나라에서는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할 때 검사관이 여행자에게 맨 처음에 묻는 말이 “당신 종교가 뭔가?”라는 것이란다. 여행자가 종교가 없다고 하면 검사관이 야단을 친다는 것이다. 종교 없는 게 인간인가, 무슨 종교라도 좋다, 네가 돼지나 염소하고 뭐가 다른가 하고 호통을 친다는 말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마음 속에 존경하는 사람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면접시험에서도 꼭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이 나온다. 존경의 대상이 부모이건 대통령이건 스승이건 또는 가수나 탤런트이건 있다고 해야 당사자는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 그 존경의 대상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항상 변한다. 나는 이런 평가 때문에 존경을 받으니 절대 변해서는 안 된다고 하루 스물네 시간 긴장하는 사람은 답답할 뿐만 아니라 보기가 싫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그 사람의 혁혁한 업적 때문이기도 하고 인생을 살아오는 과정에 어느 순간 훌륭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존경받던 학자나 교수가 관직을 맡아 일하다 칭찬을 못받고 물러나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그런 사람이 관직에 있을 때 빛을 못내고 실수를 했다고 해서 학자나 교수일 때의 업적과 행위도 무산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의 수가 자꾸 줄어드는 이유 중의 하나도 사람들이 존경의 대상이 하느님처럼 완전 무결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신(神)이다.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나온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이며 그 후에도 수많은 작품을 써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했다. 그의 추종자도 참 많다. 작가로서는 성공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엉망진창이다. 결혼, 이혼을 되풀이하고, 부인을 흉기로 위협하고 때려 살인미수죄로 기소되기도 했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말년에 뉴욕 시장인가 상원으로 출마했을 때 웃으며 박수를 쳤다. 똑같은 경우가 한국에서도 생긴다면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매장되었을 것이다.

문(文)은 인(人)이 아니고, 문은 문이요 인은 인이다. 사람이란 밝은 데도 있고, 어두운 구석도 있는 존재이다. 이제는 그 밝은 데를 보면서 살아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셰익스피어를 좋아하고 톨스토이를 사랑한다.

 

 

 

이근삼

극작가. 서강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