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대에 부는 바람

                                                                                                       윤소영

 “엄마! 저 바다 좀 보세요. 청자빛이네. 이제야 왜 그렇게 엄마가 청자빛을 좋아하는지 알겠어. 엄만 바다를 유난히 좋아하잖아요.”

14세 된 큰애가 눈앞의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견대(利見待)에서 내려다보는 겨울바다는 하얀 포말 사이로 말간 청자빛을 드러내고 있다.

“정말 그러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 하면 얼핏 파란색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상 바다만큼 다양한 색상을 지닌 것도 없다. 날씨에 따라 물의 깊이에 따라 시간에 따라 그 색이 끝없이 달라진다. 반도인 국토를 삼면으로 감싸 흐르는 바다. 그 바다의 모든 물빛을 아우르는 색으로 우리 조상들은 한마디로 집어낼 수 없는 오묘한 빛`─`흐린 듯 맑고, 깊은 듯 무심한 고려자기의 ‘비색’을 걸러낸 것이 아니었을까.

파도는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문무왕릉이 놓여 있는 대왕암 주변에서 물결은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쳐 올라 거품을 토해 냈다. 겨울비에 바람까지 겹친 날씨 탓인지 갈매기 떼가 급하고 어수선하게 해변으로 날아들었다.

사람에게 저마다의 품격이 있듯 공간이나 장소에도 품격이 있는가 보다. 천년 고도 경주의 앞바다인 감포는 귀족적이면서도 호방하고 엄숙한 기품을 지녔다. 천연의 위용에 문무왕의 영령이 깃들여 신령스런 기운이 주위에 감돈다.

신라의 30대 왕인 문무대왕은 자신이 죽으면 불교 의식으로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내라는 유명을 남겼다. 용이 되어 바다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의지에서였다. 그 뜻을 받들어 유골을 수중에 안치하고 무덤을 둘러싼 둥근 바위에 제사를 올렸으니 그것이 바로 대왕암이다.

왕은 생전에도 왜구를 막는 데에 열심이었다. 용당리의 명당에 진국사(鎭國寺)라는 사찰을 짓기 시작한 것도 부처님의 힘으로 왜의 세력을 누르고자 함이었다. 후에 아들인 신문왕이 이 사원을 완성하고 부왕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감은사(感恩寺)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지금은 건물이 모두 소실되고 세월을 뛰어넘은 두 개의 거대한 탑만이 수문장처럼 빈 절터를 지키고 있다.

이 감은사지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해룡이 된 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의 기단 아래에서 바다 쪽으로 통로를 낸 흔적이 있고, 바닥도 우물마루의 형태로 만들어 물이 들어 찰 수 있게 한 점이다. 용이 된 왕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그만큼 깊었던 것이다.

인간의 염원이란 무엇일까. 간절한 마음은 육신의 사멸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는 것일까. 삼국을 통일하고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문무대왕. 고단했던 생애를 내려놓고 안식을 취하고 싶었으련만, 그는 흔들리는 물살과 더불어 영겁을 뒤척이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그 뒤척임으로 인해 왕은 다시 살아나 강렬했던 호국의 일념을 오늘도 동해의 푸른 파도 속으로 풀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닐는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견대는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무덤을 지켜보던 곳이다. 대왕암을 조망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듯 싶게 바다와 바위와 하늘이 빼어난 구도로 조화롭게 맞물려 있다. 수중릉이 있는 곳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 그 일대의 바다가 더욱 신성한 빛을 머금은 듯 보인다.

무슨 소리에 놀랐는지 갈매기 떼가 한꺼번에 날아올라 어지럽게 퍼덕인다. 대왕암 주변의 파도가 거칠게 흔들린다. 예나 지금이나 바다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 이곳으로부터 달려드는 것이 어찌 왜구뿐이랴. 감당할 수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국의 문물과 풍조도 위험하기로는 그에 못지않다. 속된 물질 만능이 산하를 뒤덮고 언어마저도 국적 불명의 혼혈아가 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대대로 내려온 소박하고 인정 깊은 생활은 점점 자리를 빼앗겨만 간다. 정신이든 문화든 지켜내지 못하면 노략질을 당하는 법이어서 문무대왕은 오늘도 쉼없이 부침하는 파도처럼 잠시의 휴식도 취할 겨를이 없다.

나는 이견대에 서서 바다 저만치쯤 문무왕과 신문왕의 눈길이 마주쳤을 법한 자리를 더듬어본다. 이 땅과 백성들을 사랑하여 끝내 떠날 수 없었던 영혼과 그 넋을 그리워하는 충정(衷情)이 서로 만났을 그 어디쯤을. 이견대에 서면 누구나 의지 없이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고, 간절한 염원이 없다면 그 무엇도 계속될 수 없음을 안다. 겨레의 땅을 떠나지 않은 무수한 혼백들이 산천 곳곳에 어리어 뒤척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겨울비가 유구한 세월 위로 내린다. 이견대에 부는 바람은 빗물과 하나되어 붉은 흙과 청자색의 바다 속으로 조용히 흘러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