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회 추천-

 밑줄긋기

                                                                                                 徐 淑

 산을 좋아하는 한 친지를 만나 그의 근황을 들었다.

“여름 휴가를 맞아 설악산을 다녀왔어요. 대청봉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보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가슴 벅찬 감동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쌍하기 한량없게 생각되지 뭐예요.”

동양란에 심취하고 있는 한 친구 생각이 난다. 그는 나를 만나면 곧잘 열을 올린다.

“겨우내 기다리다 함초롬히 피어나는 동양란은 양란같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향기는 기가 막혀, 온 집안을 그윽한 향으로 가득 채운다니까. 그런 정취를 못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딱하게 느껴진단다.”

모름지기 누구나 저마다의 황홀경 한 가지씩은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다고 여겨진다. 어떤 서슬에, 그 무엇에 이끌려 몰두하다 보면 어느덧 열락(悅樂)의 순간이 찾아오는 때가 있다. 낚시꾼에게는 낚시의 무아경이 있을 것이요, 서태지의 팬들에게는 공연장에서의 도취경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내 나름의 몰입 대상이 있다. 책을 읽을 때 마음의 현을 건드려 줄 좋은 문장을 열심히 찾아 헤매는 버릇이 그것이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기쁘기 한량없다. 골똘하게 궁리하던 난해한 문제의 해답을 일시에 찾아낸 듯 세상이 훤해진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이런 책읽기의 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쌍해.”

산을 즐기는 사람, 난을 사랑하는 이의 정성 못지않은 집착이 나의 문장 순례에도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다. 한 권의 책을 읽어 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바치기 때문이다. 좋은 표현과 맞닥뜨리게 되면 나는 밑줄을 치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래서 줄을 쳐야 할 부분에 마침 필기도구를 들고 있지 않을 때면 글읽기가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는다. 이런 습관 탓에 같은 책을 꼭 두 번 이상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버릇도 들었으니, 이도 여간 미련한 노릇이 아니다. 처음 책을 손에 잡으면 우선은 대충대충 빠르게 읽어 나간다. 그런데 그 책에 이거다 싶은 표현이 있거나 문장이 심상치 않다 싶으면 재독(再讀)으로 들어간다. 그럴 때면 본격적으로 밑줄을 그으면서 읽어 나간다. 밑줄을 긋는 것으로 직성이 풀리지 않으면 아예 공책에다가 옮겨 적기를 한다. 신문 스크랩하는 것하며 일기를 쓰는 일도 모두 밑줄긋기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습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글 저런 문장을 기웃거리며 배회하다 보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주제가 생겨나곤 한다. 예컨대 한동안은 ‘시간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에 늘상 시간에 대한 언급을 찾아다녔다. 우리의 일회적인 삶에 주어진 이토록 한정된 시간을 두고 이 파악하기 힘든 정체에 대해 책 속에서 답을 찾아보았다.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도 좀체로 해결되지 않는 또 하나의 화두는 ‘언어란 무엇일까’라는 것이었다. 언어와 의식, 언어의 추상성과 사변성(思辨性), 언어와 문학 등등에 관심을 갖고 방황하다 보니 자연 그것에 대한 수사(修辭)가 나의 공책에 가지런히 쌓여갔다. 그 와중에 길어 올린 아름다운 구절들은 이제 나에게 빛나는 보석이 되었거니와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소설가 박경리의 탄식이다.

진실이 머문 강물 저 켠을 향해 한 치도 헤어날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이러한 구절들이 남겨진 것은 물론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 습관 덕분이다. 그런데 실상 정말로 좋은 책은 어디서 어디까지 줄을 그어야 될지 모를 지경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린 왕자』의 어느 부분을 빼고 줄을 칠 수 있으랴.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의 입을 통해 스코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를 최고의 소설로 꼽았다. ‘어느 때,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실망하지 않는다. 한 페이지도 시시한 곳이 없다’라고 했다. 하루키에게 개츠비가 있다면 나에게는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이 소설은 내게 시들지 않는 꿈으로 다가와 언제나 사랑과 동경을 이야기한다.

남들이 써놓은 글에 밑줄을 그으며 생각을 가다듬다 보면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의 밑줄긋기로 이어질 것 같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오래도록 지니게 될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긴 여정 속에서 나는 오늘도 서성인다. 인생의 탐색 지도를 작성하려는 몽당연필을 들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