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自尊心)

                                                                                            윤모촌

 대설(大雪) 소동의 눈 길이 채 녹기도 전에, 한 차례 폭설이 또 내리고, 연이른 강추위 속에서 이번엔 더 큰 눈이 내렸다. 지난번에 이어 시설재배 농가들이 큰 설해(雪害)를 입었고, 30년 만이라는 눈 소동 속에 우수절(雨水節)이 지나가도록 나는 거의 두 달 동안을 갇혀 지냈다. 갑갑하기가 짝이 없었지만, 겨우 지탱하는 시력을 보호하느라 신문도 끊고 지내면서, 불만이면서도 TV와 라디오를 끼고 지낸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심기를 뒤집기 일쑤여서 스위치를 끄게 하는데, 끄고 나선 13층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소일(消日)거리다. 스위치를 끄기는 했어도, 민족의 자존심이 병든 세월들이 어른거리며, 자존심 꺾는 일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밖의 사람들이 우리를 부패공화국이라 한다는 것도 그런 것이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불법 체류를 미끼로, 노임(勞賃)을 떼어먹는다는 것도 창피한 일이다.

밖에는 쌓인 눈이 처연해 보이고, 설해를 입은 농민들의 모습이 선연해서 마음이 어둡다. 눈의 무게를 못 이겨 무너진 시설물 속에, 수천 마리의 닭이 폐사한 앞에서, 할말을 잃고 있는 농민의 사정이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 노력한 만큼만을 바라면서 사는 사람들의 참담한 상황에, 나는 하늘이 무심하였다. 시어미에게 당한 분풀이를 부뚜막에 한다는 며느리 격으로, TV 스위치를 끄기는 했지만 끄고 나서도 심기가 편하질 않아 흐르는 세월이 허탈하다. 다른 나라 지도자가 부러워진다. 자리에서 물러나고서도 존경을 받는 모습을 보면 별수 없이 내 자존심이 초라해져 간다.

 

채제공(蔡濟恭)의 기개 있는 자존심이 부럽다. 가난한 그가 공부를 하며, 부귀한 집 자제(子弟)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한다. 세모(歲暮)를 당해 시 한 수씩을 짓자며 호기를 부리는 그들에 의해 채제공이 시를 짓는다. ‘秋風枯栢鷹生子, 雪月空山虎養精(추풍고백응생자, 설월공산호양정)’ 채제공의 이 시를 놓고 시가 아니라고 그들이 비웃었지만, 채제공은 의연하다. ‘가을바람 마른 가지에 매가 새끼를 쳤구나, 눈 덮인 달 밝은 산엔 호랑이가 정기를 기르고’ 한 이 시를 정승이 아들을 불러 뜻을 말한다. ‘가을에는 매가 새끼를 칠 수가 없는 때인데도 새끼를 쳤다고 했으니, 그 꼴은 제 모습이 아닐 것인즉, 이것은 곧 못난 너희들은 빗댄 것이니라. 달 밝은 설산(雪山)에 호랑이가 정기를 기른다 했음은, 채제공 자신의 기상을 드러낸 것이다.’ 채제공은 과연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르고, 천주교 박해 때 신도들을 관용한 재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에 이른다.

나는 채제공의 의연한 국량(局量)의 그 자존심이 좋다. 사람을 볼 줄도 모르는 속물적 권력층의 철없는 것들을 시 한 수로 눌러놓은 그 자존심이 멋있다. 시의 뜻도 모르는 멍청이들을 앞에 놓고, 연민에 젖어 혀를 찼을 그 우월적(優越的) 자존심이 장쾌하다.

자존심은 속되지 않아야 자존심이고, 인내가 바탕일 때 자존심이 된다. 다 아는 얘기`─`한(漢)의 무장(武將) 한신(韓信)의 그것이 그러한 것. 덩치 큰 그가 남루한 옷을 걸치고, 허리에 찬 장검(長劍)을 철그럭거리며 거리를 어슬렁거릴 때, 불량배들이 그를 희롱을 한다. 차고 있는 장검으로 자기를 쳐보라 하고, 못 치겠으면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 보라고 한다. 하지만 한신은 아무 말 않고 엎드려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갔다. 사람들은 바보라 하였다. 칼에 쓴 녹을 벗기기 위해서라도 뽑아들어야 했을 칼을 뽑지 않은 바보 무장`─`후일에 그는 명장(名將)이 되지만, 공법(公法)도 안중에 없고, 권세만을 착각하는 속물들에게 한신의 그것은 더 바보이다.

강산(江山)의 자존심을 무너져내린 세월 속에서, 나는 좀 흥분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세월의 모습이 어떻게 흐른다한들 그것이 무슨 대수로운 일이랴. 친일 매국한 자의 후손에게, 매국해 얻은 재산을 재판이 되찾아 물려준 세월임에랴. 자존심은 이제 없다. 수사적(修辭的) 용어의 하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