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사진

                                                                                           具良根

 아파트에는 벽면이 많아서 액자로 빈 공간을 메우기에 좋다. 우리 집도 벽에 걸려 있는 액자가 대충 열 개는 된다. 그 외 장롱 옆에 예비로 세워둔 것도 열 개가 더 된다. 물론 이 숫자는 지금까지 폐기처분한 것을 제외한 숫자이다. 액자는 글씨와 그림을 말하는데 물론 그림이 훨씬 많다.

글은 우리 내외를 아끼는 사람이 특별히 써 준 것이고, 그림은 두세 개 기증받은 것을 제외하면 모두 외국 여행에서 구한 것이다. 나는 중국을 자주 드나들기 때문에 중국 그림이 가장 많고, 몽골, 러시아 것도 있고, 일본, 프랑스 것도 한 점씩 있다. 또 내가 아주 아끼는 것으로 이북 그림 두 개가 있다. 이북 그림은 심양(瀋陽)에 갔을 때 조선족이 사는 백탑거리에서 식사를 하다가 우연히 들러 산 것인데, 어찌나 생동적이던지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한 장은 금강산을 그린 것이고, 또 하나는 ‘내칠보 계곡’이라고 써져 있다. 금강산 그림은 장엄한 금강산의 아침 안개가 금방 앞으로 다가오는 듯 입체적이고, 내칠보 그림은 칠보산의 물 소리며 바람에 잎사귀 스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생동적이다.

그런데 전에는 그림 이외에 사진도 있었다. 사진작가이신 광주의 사촌형님이 준 것이었다. 형님께서는 사진을 좋아해서 전국 각지에 사진을 찍으러 다니고, 외국까지 가서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오신다. 개인전도 하고 출품도 여러 번 하셨다. 서울에서 전시회가 있어서 출품하고 가면서는, 가지고 갈 번거로움도 덜 겸 큰 맘먹고 두세 점을 나에게 주고 가셨다. 너무나 귀한 것을 주었기 때문에 잘 보관하고 벽에 바꾸어 달곤 하였다.

그런데 형님에게는 대단히 죄송한 말씀인데 사진은 금방 싫증이 났다. 너무나 사실 그대로를 옮긴 것이라 그랬을 것이다. 특히 내가 태어난 곳 운주사 와불 사진은 가슴이 메이도록 그리운 곳인데도 오래 두고 보기에는 물린다는 것을 알았다. 사진과 그림은 그 가치며 운치가 전혀 상대가 안 되었다. 일 점 일 획도 다르지 않게 사실 그 자체를 담아놓은 사진은, 작가의 개성을 살려 그려놓은 그림에는 어림도 없이 못따라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림과 사진과의 관계를 문학과 역사에 비교해 보고는 아주 그럴싸한 비교가 아닌가고 생각했다. 나는 대학에서 어문학을 전공하다가 그것이 시시하다고 느끼고는 사학에 빠져 10년 세월이나 광야를 헤맨 경험이 있다. 역사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어떤 마력이 있었다. 역사를 공부할 때는 다른 모든 학문이 우습게 보였다. 나만이 가장 진짜 학문을 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책을 산더미처럼 사고 또 사고, 일본 외무성 외교 사료관에 파묻혀 몇 년이고 나올 줄을 몰랐고, 규장각 도서에 빠져 몇 달이고 빠져 나올 줄을 몰랐다. 그래서 저서도 남기고 새로운 자료도 수없이 찾아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내가 새로운 논문을 발표하고 새로운 자료를 공포하면 세상이 깜짝 놀라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다. 그렇지가 않을 뿐만 아니라 별 관심이 없다. 내가 하두 대단한 것이라고 말을 해대면 “그래? 그런 일도 있었어?” 하는 것이 고작이고, 금방 잊어버린다. 화가 나서 살 수가 없다. 나는 점점 더 ‘괴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일본 외무성 외교 사료관에서 우리 독립군 창가집을 최초로 찾아내서 어느 연구소 휘보에 창가집의 원본 사진과 함께 내용을 발표했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난 후에 국가보훈처 연구원들이 자기들이 최초로 발견했다며 책을 아예 영인하여 단행본을 내고, TV 9시 뉴스 시간에 대대적인 홍보를 하지 않은가. 나는 보훈처에 즉시 전화를 하여 강력히 항의하고, 그 해설을 써준 서울대 S교수에게도 전화해서 다음에 재판을 낼 때는 내가 최초 발견자라는 것을 반드시 명기하겠다는 확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해서 나는 이처럼 화를 내고 있을까. 그까짓 것 당시 우리 독립군들은 모두 다 부르던 노래이며, 일본인 첩자가 입수하여 그들의 외무성에 공개되었으며, 비록 현대인이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발견할 것은 정해진 이치인 것을. 나는 새로운 자료를 발견할 때마다 끝에는 이와 비슷한 허탈감이 엄습했다. 나는 무엇인가 허깨비를 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또 내가 그처럼 심각하게 심혈을 기울여 쓴 논문을 누구 하나 읽었다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독자는 나 혼자란 말인가. 가끔 내 논문을 읽었다는 사람이 있을 때면 그를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다. 그런데 그 읽었다는 사람도 그다지 감명을 받은 것 같지가 않다. 그저 ‘그런 일도 있었군!’ 하는 정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란 역시 지나간 하나의 사실에 불과하단 말인가. 나는 깊은 회의에 빠지고 있었다. 있는 사실 그대로 사진을 찍어놓은 것이 무슨 가치가 그리 많으며, 그것을 알았으니 어떻다는 것인가 하는 식이다.

생각해 보면 사실만을 써야 하는 역사는 아무리 잘 써도 그 안에 반드시 잘못이 수두룩하며, 설사 완전무결하게 사실을 썼다고 한들 하나의 사진에 불과했다. 그보다는 사실대로 그릴 아무런 필요도 없이 마음껏 휘지한 문학은 누가 흠도 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폭발력은 가히 경이적이다. 역사에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이 벽에 부딪치던 것도 문학에서는 어떤 벽도 무너뜨릴 수 있으며 우주를 종횡무진 비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역사와 문학을 새와 비행기에도 비겨보았다. 사람은 새처럼 날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새처럼 날 수 없었다. 그래서 노력하고 노력하다가 비행기를 만들어 냈다. 만약 그때 사람이 새처럼 완전히 날 수 있었다면 비행기는 아직도 없을지 모른다. 원래 사람이 날 수 없어서 만들어낸 비행기였지만, 오늘날 비행기는 새보다도 열 배, 백 배 더 높이 멀리 날 수 있지 않은가.  

역사에 빠진 지 10년도 더 되어 나는 심한 갈등에 빠지고 있었다.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던 한 스승이 있었다. 선생님은 이제라도 나더러 다시 어문학과에 입학을 하라는 것이었다. 내 특기는 바로 그 어문학이라고 했다. 학문의 장르에서도 문학이 역사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긴 원로(遠路)를 요행(繞行)하기로 작정하였고, 그 길을 다 돌고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사진의 세상에서 그림의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김에 불후의 명화도 한 폭 그려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