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가는 길

                                                                                                  劉庚煥

 겨울이 말끔히 물러가지 않았는데 비가 온다. 잔뜩 흐린 하늘을 보며 또 눈이 오리라 싶었다. 그런데 주룩주룩 비가 온다.

철이른 비라 빗소리가 예사롭지 않고, 빗줄기를 보는 기분이 야릇해진다.

빗줄기에 청순한 느낌이 온다. 나무들이 비를 맞으면서 푸들푸들 살아난다. 생기(生氣)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것이라고 혼잣말을 해본다.

뜻밖의 비이지만 반기고 싶은 것은, 속마음에 묻은 때를 씻어보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청순한 욕심도 욕심이다.

얼마나 오래 내릴지 짐작할 수 없으나 제법 빗방울이 굵어진다. 이미 가는 이슬비가 아니다. 비 닿는 소리가 자욱하다. 안개처럼 소리가 보인다.

시원하다는 느낌이 밀려온다.

겨우내 세상살이가 찌든 것이었는데, 빗소리가 들어차니 청순한 충만이 오히려 반갑고 또 고맙다.

자연이 만드는 소리는 음악의 원형이다. 원형이란 근본을 지녔다는 뜻인데, 근본이 지닌 것은 조화(調和)이다. 자연은 그 자체가 조화의 노출이다.

조화로서 자연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어떤 작곡도 자연의 소리만큼 조화롭지는 못하다. 자연에 안기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까닭도 이렇게 설명된다.

자연의 소리는 그대로 자연 음악이다. 빗소리를 음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 후두둑이던 비가 그치고 슬그머니 한쪽 하늘이 훤히 개이기 시작한다.

한쪽부터 트이는 하늘이 이내 푸르러진다. 언제 비가 내렸더냐는 듯 하늘은 완전히 새푸러졌다. 눈으로 내리다가 도중에 비가 된 것이었을까. 하여간 그친 뒤에 그 뒷맛이 개운하니 소나기라고 우기고 싶다. 겨울 소나기.

개울 물이 불었다.

엉겨붙었던 것들이 쓸려 내려간다. 빗물은 비로 내리는 것 이상의 몫을 한다. 보기에 좋으며, 보고 있노라면 기분도 상쾌해진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곳의 잔설까지 녹여내리라. 꼭 그러리라.

 

어쩜, 이미 봄은 다가와 고개를 들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를 기다리며 숨어 있는 봄을, 나만 눈치채지 못한 것이 아닐까. 고개를 갸웃거려 본다. 민심이라는 것에서도 나는 늘 그랬다.

빗물은 불어서 얼음때를 벗기며 잔돌을 이리저리 굴려서 밀어내게 한다. 개울을 깨끗이 씻어내기 전에 빗물이 얼음부터 풀어내는 것을 이제야 눈여겨본다. 오묘한 이치, 이치조차 순서를 알고 기다린다.

이렇게 봄이 다가옴을 감지한다. 자연의 소리가 경직된 나의 내면에 스며들듯, 흙에 스며서는 풀로 돋아나며 그리고 바람과 합쳐서는 연두색을 만든다.

따라서 나무들도 곧 연두색으로 바뀔 것이다. 옷을 바꿔 입듯 그렇게 달라질 것이다. 그때 바람에서 초록 냄새가 나면, 나는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할 것이다.

흙내음이 구수하다는 말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다분히 경험적인 정서 표현이다. 생기를 뿜는 흙내음은 얼마나 많은 농부들을 서둘러 불러내었을 것인가.

“아, 이렇게 철이 바뀌는구나…….”

감탄사를 아낌없이 내놓는다.

한 60여 년 살아 보았으니, 기억할 만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여러 번 겪었을 터인데, 모두지 기억에 남는 계절 변화가 마음 갈피에 걸려 있지 않다.

계절이 지닌 참뜻을 제대로 알아차린 적이 없고, 덤벙덤벙 물장구치듯 맞아서 보낸 탓이겠지 싶다. 이제사 철이 바뀌는 과정을 피부로 느끼면서 새삼스러워한다.

오늘 이 봄기운조차도 내겐 새로운 발견처럼 살갑다. 고요가 가득 차 있으나 질서도 있고, 침묵이 무게를 누리나 이를 수용하는 기운 또한 있다.

침묵을 제압하고 있는 분위기가 벗겨지면 비로소 봄이 솟구치리라. 이런 기운을 감지할 땐 생각이 우물물처럼 괴어온다. 생각의 깊이라는 것도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신비를 느끼면 자연은 단순한 유기체(有機體)가 아닌 어떤신성(神性)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청순한 이 생기를 소중하게 품어안고 싶다. 자연스러운 것이 건강하다는 말도 이치에 맞는 말이다.

자연이 생기를 회복하는 과정이 이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가 하며 다시 놀란다. 빈 가지를 덮었던 자욱함이 걷히자 나무들이 윤기를 낸다.

산뜻한 표정으로 겨울 산이 살아나고 있다. 어째서 그 전에는 이런 풍치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지 아쉬운 생각이 든다.

 

포도원으로 가는 일꾼들이 산마을에서 내려온다. 일꾼은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갈 것을 미리 알고 기다렸나 보다. 현명한 농부에겐 달력이 필요없다던 말 그대로이다.

이들에게 경험이란 계속된 실험이다. 실험의 누적은 확률상 높은 정확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겉도는 이론보다 경험법칙이 더 실증적이라는 사실을 그 동안 우리는 너무 경시하여 왔다.

그 결과, 관념적 오류를 그냥 지나치는 폐단에 빠지곤 하였다. 현명한 농부라는 말도 지식인이 구사하는 형용사이고, 정확히 말하자면 성실한 농부라야 할 것이다.

일꾼들은 크레파스로 그린 초등학생 그림처럼 농원 길을 한 줄로 걷는다. 이런 풍경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고 있자니, 내게도 새로움을 맞아들이는 즐거움이 움찔 솟는다.

산 밑에 자리잡고 사는 재미에는 이런 즐거움을 남보다 일찍 맛보는 기쁨도 있다. 누군가에 큰 소리로 알려 함께 보고 싶은 그림이건만 지금 내 곁에는 함께 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늘이 청소되었는지 하늘빛이 눈부시다. 마치 큰 덩어리의 보석 같다. 보석빛 하늘 아래서 새로운 계절이 조여들고 있음을 느낀다. 조용한 자리바꿈은 얼마나 보람찬 것인가.

추녀 밖으로 성큼성큼 몇 걸음 내딛으면서 기지개를 켠다. 자연은 만물과 언제나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분명한데, 인간의 귀로 이를 듣지 못한다고 나 자신에게 타이른다.

아마도 흙이 하늘에서 간절히 소나기를 원했나 보다. 거짓말처럼 소나시 한 번에 연두색 안개가 자욱이 덮이는 것은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닌가.

지금쯤 산에는 골짝마다 내장이 겉으로 드러나 있겠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리도 빠르게 산 색이 변할 수 있으랴.

갑자기 사우나라도 하고 싶다.

이런 충동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 속때를 못 벗기면 겉때라도 벗겨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욕심이다. 욕심에는 분명 청순한 욕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