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방

                                                                                         문혜영

 어머니가 떠나신 후 처음 맞게 된 새해 아침, 시댁 차례를 끝내고 부지런히 역삼동 언니 집으로 달려갔다. 안 계신 줄 뻔히 알면서도 “어서들 오너라” 하면서 반겨주시던 어머니의 음성을 기대했던가. 차례상 위, 아버지 영정 옆에서 묵묵히 웃고만 계시는 어머니 영정을 보자마자 어린아이처럼 울음이 터졌다.

어머니가 거처하시던 방으로 달려들어갔다. 어머니의 체취와 사랑이 너무나 그리워서……. 낮은 침대와 명주 솜이불, 문갑 위의 사진, 화장대 위의 손거울과 머리 빗, 전화기 옆의 수첩 등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주인인데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고 있는 듯, 모든 것이 다 예전 그대로다.

벽에 걸려 있는 달력조차도 어머니가 떠나신 2000년 8월에서 머물러 있다. 세월이 정지되어 있는 방, 달이 여러 번 바뀌었고 해도 바뀌었지만 주인을 잃는 바람에 세월도 잊고 있는 방.

삼우제를 치르고 열흘인가 보름인가 지났을 무렵, 언니는 어머니가 살아 계신 것 같은 착각 때문에 견딜 수 없다고 했다. 금방이라도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고, 밤중엔 특히 방에 계신 것만 같아 여러 번 놀란다고 했다. 되도록 빨리 어머니 방을 정리해야겠다고 했다.

슬픔 때문에 너무나 기진해 있었고, 어머니 유품들을 대할 자신이 없었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언니 마음을 모른 척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역삼동에 달려간 그 날, 내가 한 일이라고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운 일뿐이었다. 옷장 속에서 즐겨 입으셨던 옷가지 몇 점 꺼내 놓고 통곡하고, 문갑 속에서 고이 간직해 오셨던 우리들의 편지를 찾아내 놓고 또 통곡하고, 온종일 어머니 방에서 울다가 나온 동생의 얼굴을 측은히 바라보다 눈물짓던 언니는 어찌된 영문인지 어머니 방을 정리하겠다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1914년생이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격랑의 세월을 살아오신 분이다. 일정 시대에 이화여전을 다니셨고, 해방과 더불어 고향인 원산에서 공산 치하를 겪으셨으며, 한국전란 중엔 고향, 남편, 아들을 잃으셨다.

18년 전 어머니의 고희 기념 문집을 만들 때 축시를 써주셨던 두 분의 시인이 어머니를 다같이 청죽으로 비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딸 넷을 데리고 월남하여 혼란의 시대, 척박한 땅에서 뿌리내리며, 곧고 푸른 생명력으로 살아오신 내 어머니. 우리 딸들에게 있어 삶의 표상이고 정신의 지주였던 분. 한 점 흔들림이나 흐트러짐을 보인 적 없으셨고, 자신과 딸들에게 지나치리 만큼 엄격하셨던 분.

그러한 어머니가 어느 해부터였는지, 청죽에서 여린 풀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노년에 들어 한없이 다정하고 자상하셨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어렸을 적 해보지 못한 응석을 뒤늦게 부려보면서 좋아하다가 문득 기운이 꺾이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가슴 철렁해지곤 했었다.

아무리 세월이 어머니 기운을 앗아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정말 이상스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언제까지나 우리들 곁에 계실 것이란. 삶의 힘든 고비들을 정말 푸른 생명력으로 이겨내신 분, 그깟 폐렴에 꺾이실 분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들 믿음은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던가.

영결식을 끝내고 폭우 속에 장지로 향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길을 가고 있었다. 생전 처음 가보는 낯선 길, 낯선 땅, 그러나 앞으로 수없이 찾아나설 길이며 땅이었다. 장지에 도착하여 나는 퉁퉁 부운 눈을 들어 사방을 살폈다. 아늑한 동산에 햇볕 바르고 시야가 시원했다. 어머니가 싫어하지는 않으실 것 같아 안도감이 느껴졌다. 공기 맛도 흙 맛도 달게 느껴졌다.

하관식을 할 때 나는 울지 않았다. 어쩌다 돌덩이나 칡뿌리 하나라도 딸려 들어갈까봐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깔끔한 어머니 성품에 돌덩이 칡뿌리가 성가시다 하실까봐.

어머니가 누워 계신 관 위로 흙을 덮을 때, “어머니한테 어떻게 흙을 던져” 하며 오열하다가 하마터면 삽을 든 채로 어머니 관 위로 쓰러질 뻔한 큰언니와 달리, 난 “어머니, 따뜻하게 덮으세요” 했다. 입관식할 때 오래도록 껴안고 있어도 전혀 따뜻해지지 않던 어머니의 얼음 같던 발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생전에 발이 늘 시리다고 하시던 어머니, 여름에도 도톰한 양말을 신으셨던 어머니, 병상에 계실 때 가만가만 발을 만져드리면 좋아하셨던 어머니, 즐겨 덮으시던 명주 솜이불은 아니지만 흙을 덮고 계시면 좀 괜찮으실 듯싶었다. 흙을 그때처럼 따뜻하게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비 내리는 산 속에 어머니를 모셔두고 온 그 날 밤, 나는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산 속 어머니의 새 방이 끊임없이 눈앞에서 떠나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어머니의 마지막 눈빛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의식을 잃어 중환자실로 옮겨진 후 잠시 깨어나셨을 때, 어머니는 평생에 한 번도 뵌 적 없는 눈빛으로 뭔가 간절히 원하셨다. 그러나 난 무엇을 원하시는지 몰라 한참을 헤매고만 있었다. 그런 내가 안타까워 어머니는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뭔가 쓰셨다. 얼른 메모장을 꺼내고 어머니 손에 펜을 쥐어드렸는데 어머니가 쓰신 글씨를 난 읽어낼 수가 없었다. 중환자실을 나온 뒤에야 그것이 ‘방에 갈래’임을 알게 되었다.

중환자실, 그곳은 인간의 품격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꺼져가는 생명을 붙들려는 치열한 싸움만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던가. 생전에 어느 누구에게도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 밤, 아무리 퍼붓는 빗줄기처럼 어머니께 사죄를 드렸지만, 우리들의 불효가 씻어지진 않을 것이다. 결국은 그렇게 가실 것을, 편히 놓아드리지 못하고 어머니를 붙들 욕심에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만 드렸으니…….

이제 어머니는 원하시던 방에서 편히 쉬고 계실까. 우리들 곁을 떠나신 지 반 년, 그러나 난 아직 어머니 방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사는 울보 딸일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