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박현정

 ‘속죄 양의 아내’라는 동화가 있다. 속죄 양은 고객들의 비난을 대신 들어주고 살아가는 양이다. 그가 속죄 양의 길을 택한 것은 집안 대대로 이어온 일이어서 그 길을 잘 알고 있었고,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속죄 양의 성격이 자꾸 거칠어져가는 것이 못내 두려웠다. 어느 날 아내는 남편을 잠재우고 대신 속죄 양 노릇을 하러가서는, 고객의 비난을 들어주는 대신 멋진 노래를 불러준다. 고객의 고통을,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으로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들려주는 것으로 위로해 준 것이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속죄 양은 배우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꿈을 생각해 낸다. 막막한 미래가 두려워 시도해 보지도 않고 포기했던 배우의 길을 용기를 내어 시작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에게 맞는 이름으로 세상이 나를 불러주길 기대한다. 알파벳 K를 자신을 대표하는 철자로 소유한 카프카처럼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맞는 빛깔을 찾아 떠나는 여행일 것이다. 보편적으로 해충으로 알고 있는 파리조차도 농학자의 연구실에서는 익충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자신에게 맞는 곳을 찾아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어쩌다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게 되면, 한 번씩은 누구하고나, 학창 시절 일 년 정도 우리에게 영어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것은 영어 선생님이 젊은 아내와 어린 아기를 두고 사고로 훌쩍 세상을 떠난 안타까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생각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영어 선생님은 첫 시간에 들어와서는 학생들 전체에게 영어로 된 이름 하나씩을 주셨다. 그것은 그냥 이름이 아니라 문학작품 속에 나오는 여자들의 이름이었다. 김순애는 ‘햄릿’의 연인 오필리아, 너는 ‘좁은 문’의 알리사와 같은 식이었다. 그 이름이 비록 책에 나오는 여인들의 이름을 빌려온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라도, 나는 거기에서 학생들을 향한 선생님의 나름대로의 생각과 열정을 읽은 것 같다. 그리고 내 이름은 들릴라였다. 나를 그런 이름으로 정하다니, 나는 속으로 좀 분개했다. 그때 나는 에로스의 여인 프시케 정도로 불리고 싶어했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 때문인지, 나는 책을 보다가 혹은 반대로 어떤 사람을 떠올리면서, 이 책의 주인공과 내가 아는 현실의 누구와 닮았다고 생각하며 이름을 붙여보곤 한다. 누군가 내게 다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또 사람은 이름에 의해 자신이 형성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서양 동화 속에 나오는 여러 공주와 왕자들이 벌인 보물찾기 모험이나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자신의 또다른 이름을 찾기 위한 투쟁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운명과 환경 그리고 얼마큼의 노력과 좌절 끝에 지금 이 자리에 있지만,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어쩐지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마음, 정말로 내 가치를 알아주고 날 반겨줄 누군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두고 온 꿈, 나는 할 수 없을 거라 여겨 미리 포기해 버린 일들이 생각날 때면, 나도 고갱처럼 이 판에 박히고 숨막히는 일상을 털고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 버리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비슷비슷한 이야기에 가끔씩 취해서 산다. 신화 속의 주인공들을 모두가 못한다고 하는 일을 보란 듯이 성취하는가 하면, 소설 속의 누구는 때를 놓치고 찾아드는 진정한 사랑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들이 왜 그렇게도 우리를 매혹하는가.

세상이 우리에게 내주는 아주 좁은 자리. 너는 이만큼의 분수를 지키고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 내린 자기 한계 속에 웅크리고 사는 많은 이들에게, 어쩌면 내 속에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저런 사랑의 불길이 타오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속죄 양이나 고갱이 될 수는 없다. 내 삶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것 같은 생각은, 자신의 자질에 따라 자각이 되기도 하지만 착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아이들끼리 다투는 중에 하는 최대의 욕은 상대방 부모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는 일이라고 쓴 중국 작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중에 이름이 가진 의미 체계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학창 시절, 들릴라라는 이름으로 나를 실망시킨 선생님은 오히려 그 이름으로 내게 잊혀지지 않는 분으로 남아 있다. 그 선생님 생각에, 들릴라라는 이름이 떠오를 때면 들릴라 역시 매력이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들릴라가 아니었다면 삼손 이야기는 우리를 그토록 강하게 사로잡지 못했을 것이다. 또 누구의 딸이 아닌 들릴라 자신의 이름으로 성서에 등장하여 자신의 삶을 세워가는 들릴라를 보며, 독립적인 여성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색깔을 찾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세상이 요구하는 한 가지 방향으로만 나를 바라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판도라의 상자가 남긴 헛된 희망만이, 시지프스가 굴복한 반복만이 생의 전부라고 믿고 싶지 않은 건 내가 아직 젊고 어리석기 때문일까. 고등학교 영어 시간에는 무작위로 정한 작품 속 등장인물의 하나로 불려진 이름이었다면, 이제는 진짜 내게 어울리는 이름을 불러주는 세상과 만나고 싶다.

 

 

 

박현정

<계간 수필>로 등단(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