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눈에 띄는 일

                                                                                             李應百

 집에서는 물론, 특히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수도(水道)에서 물을 쓸 만큼 틀어 쓰고, 틀림없이 잠그는 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대중목욕탕 같은 데서 직접 쓰지도 않으면서 샤워를 틀어 놓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보고도 남의 일에 간섭지 않는 것이 문화인(文化人)이라는 사이비 교양에 동조(同調)로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다. 샤워 물이 잘못 다른 이에게 끼얹어져도 시치미를 떼고, 예기치 않은 물세례를 받고서도 뼈골 내지 않고 담담한, 어찌 보면 도(道)가 튼 군자 같기도 하고, 무신경한 로봇 같기도 한 초예절적(超禮節的)인 현상이 벌어진다.

세수대(洗手臺)에 물을 받아 쓴 채 그냥 자리를 뜨거나, 그 자리가 더럽혀져도 깨끗이 씻지 않고 자기 용무는 끝났으니 모르쇠라 버려두는 몰상식을 항다반(恒茶飯)으로 접한다. 일본 속담에 “날아가는 새는 뒷자리를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소풍(逍風)이나 산행(山行)을 갔을 때, 놀던 자리, 음식 먹은 자리에 아무것도 떨어져 있지 않고 말끔히 치워졌을 때, 그런 행동이 2세들에게 이어져 장래가 촉망(囑望)될 터인데. 가져간 내용물을 먹었으면 포장지나 깡통, 음식 찌꺼기를 말끔히 한데 모아 도로 짊어지고 내려와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집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 상식인데, 그것들을 다 던져 버리고 노름판에서 밑천 털리고 일어서는 양 자리를 뜨면서도 일호(一毫)의 가책(苛責)을 느끼지 않는 양심(良心)의 마비 현상이 언제라야 청산될지.

국토의 혈맥(血脈)인 내와 강도 경제 개발로, 아무데서나 손으로 움켜 마실 수 있었던 물은 청정도(淸淨度)를 잃어, 요새는 수돗물도 안심하고 먹지 못하는 극단의 지경에 이른 것이다. 금세기 중반(中盤)까지 깨끗하게 물려준 선조들께 면목이 서지 않는 일인데, 그 혼탁도가 갈수록 높아지니 어쩌잔 말인가.

담배는 기호품(嗜好品)이니 술과 함께 탓할 바는 없는 성질의 것이겠다. 그러나 숨어서 도둑질하듯 배운 담배에는 제대로의 예절(禮節)이 붙따르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난다. 우선 꽁초의 처리에서 아무데나 꾸겨박지르며, 한쪽 끝이 시뻘겋게 살아 있는 꽁초를 때로는 갯똥벌레를 날려 보내듯, 또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듯 휙 던져 버린다. 이것이 가연물(可燃物)에 떨어지면 십중팔구 요원(燎原)의 불길을 일으킨다. 담뱃불을 붙인 성냥불도 마찬가지로 날리는 것을 하나의 쾌적(快適)한 행위로 여기기가 능사(能事)다. 대개 식목일(植木日)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한식(寒食)에 성묘객의 이러한 탈교양적 행위로 나무를 심는 것보다 더 넓은 넓이의 숲을 잿더미로 변하게 하는 일이 올해로 정해진 행사(行事)처럼 거듭된 것은 교통사고 세계 수위권을 면치 못함과 함께 창피한 일이다.

몇 해 전부터 거리를 가다가 용변이 급한 이를 위해 건물 입구에 신사·숙녀 모습을 그려 화장실(化粧室) 표시를 한 것은, 모양새는 좀 그렇지만 잘한 처사라고 본다. 그 전에는 공중변소(公衆便所) 하면 눈 감고도 냄새로 찾아갈 수 있게 불결하기가 일쑤였는데, 요새는 선진국 수준에 차차 접근해 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아직 화장실을 뒷간이란 개념의 연속선상에서인지 구석진 공간에 마지못해 비좁게 설치하고, 청소(淸掃)의 손길도 닿지 않은 채 버려진 꺼려지는 곳처럼 푸대접을 하는 업소가 있다. 그 집 손님 수용 인원에 비해 턱없이 좁고 불결(不潔)한 것이다. 어느 업소고 간에 화장실 시설은 그 집 주인의 의식(意識)이며 위생 관념의 단적인 표상(表象)이라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지하철을 탄다. 둘이면 줄을 서는 서구인이 우리 전철역의 장마당 같은 혼잡상을 보면 아연(啞然) 자실(自失)할 것이다. 저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 타나 걱정이 앞설 것이다. 그런데 별로 덤비지도 않으면서 자연스레 내리고 타는 것을 보면, 무질서 속에 질서(秩序)가 깃들어 있는 신비감마저 들 것이다. 나는 우리 지하철역의 모양새에서 인도(印度) 거리의 소며 달구지, 자전거, 자동차, 때로는 버스까지도 노선도 없이 붐비면서 무리 없이 통행되는 것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경로석(敬老席)에 젊은이들이 앉아 있다가 나이 지긋한 이가 오면 대개 말없이 일어서 자리를 내 준다. 한때는 자는 척 시치미를 떼는 경우도 있었지만, 요새는 그런 현상은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다. 일반석이 비어 있는데도 경로석에 앉는 젊은이를 괘씸하게 여김보다는, 무심코 빈 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이 나타나면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천진성(天眞性)을 본다. 도덕성이고 뭐고 딱딱하게 따짐없이, 그냥 무리 없이 돌아간다고나 할까.

엉덩이를 옆사람에게 부딪치듯 앉으면서 미안(未安)하다는 말이나 표정도 없고, 당한 사람도 태연하다. 남의 앞을 지날 때 백 번이면 백 번 ‘실례합니다’를 입에 달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일본이나 서구 사람들로서는 불쾌(不快)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서구인들은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할로’, 또는 ‘하이’라고 하며 웃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는 구경거리나 난 것같이 이상스런 표정으로 보면서 인사를 할 염(念)도 내지 않고, 밝은 표정으로 대할 줄도 모른다. 적응(適應)하기가 어려워서인지 외국 사람의 수효가 적어 그들과 접할 기회가 드문데서 온 현상인지 몰라도, 흔히 접하는 텔레비전 화면이나 해마다 늘어나는 해외 여행객의 눈에 비친 그들의 풍습(風習)을 가족들과의 대화 때 얼찐얼찐 비치기만 해도 그러한 서먹한 분위기가 빚어지는 일이 줄어들 게 아닌가.

문에서 마주쳤을 때 먼저 밀고 지나는 사람에게 선취득권이 있는 듯, 상대방에게 양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는데 길들여진 군상(群像)들. 이렇게 무표정하고 예절과 먼 사람들이라도 그 속 심성은 금수강산(錦繡江山)의 영기(靈氣)가 몸에 배어서인지 바탕은 곱다. 노래방이 우리처럼 성황하는 나라가 어디에 또 있던가. 이러한 고운 심성이 세정(世情)의 각박으로 자기 이익만을 챙김없이, 성실한 본연의 자태(姿態)로 돌아가 남이 믿을 수 있게 된다면 국제적 신용도(信用度)도 높아지고 나라의 번창도 눈부실 텐데.

그리고 각급 학교에 낙제(落第) 제도가 없어 실력 보장의 뒷받침이 없는 풍토에서 별로 힘들여 공부하지 않아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제도의 뒷받침 아래 노랑머리와 핸드폰, 인터넷으로 인생 최고의 향락(享樂)을 누리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앞으로의 긴 인생길이 그렇게 탄탄(坦坦)하리라는 아무 보장도 없는 거꾸로의 인생을 걸었다고 생각할 때, 때는 이미 늦었다는 회한(悔恨)에 잠길 것이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