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처럼

                                                                                               고임순

 2천년을 마감하는 세밑 날씨는 포근했다. 일기예보가 강원도 산간에는 눈이 온다는데 서울은 밤새 비가 내렸다. 책을 펴서 눈을 부릅뜨고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잠이 쉬이 오지 않는 밤. 이런저런 생각으로 꽉 찬 머리 속은 정리가 되지 않아 빗소리만이 어두운 마음을 훑어내고 있어 더욱 우울해진다.

새벽 6시, 밖은 캄캄한 밤중이다. 혼자만의 새벽 시간에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한다. 밤새 고은 우족탕을 보온통에 가득 채우고 승용차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뿌연 회색 하늘을 흥건히 적시는 빗물 속에 오고가는 차들이 헤엄치듯 미끌어져 가고 있었다. 서로 시샘하듯 내뿜는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시야가 어릿어릿 어지럽다. 간신히 위생병원으로 들어서서 눈앞에 야산이 차분하게 드러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의 병원은 조용했다. 간혹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탄 입원 환자들의 모습이 눈에 띄고, 예배실에서 새벽 기도를 드리고 나오는 환자와 그 가족들과 마주친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니 중환자실 앞에는 근심이 쌓인 사람들이 밤샘을 하듯 계단에 주저앉아 기도드리고 있는 모습이 숙연하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병든 자를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음이 얼마나 감사한가. 한 가닥 희망의 빛을 갈망하는 눈길이 머무는 곳에 액자 하나가 등불처럼 걸려 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라.’

그 앞을 조심스럽게 지나는데 진창에서 피어난 백합꽃 향기를 맡는 것 같았다.

355호실 문을 여니 밤새 안녕한 남편이 웃으며 맞아준다. 오래 전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회복이 되었었는데 다시 입원생활로 들어간 것은 욕창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아침 치료를 받고 회진을 마치고 우리는 밥상을 마주한다. 우족탕을 훌훌 마시는 남편을 보고 입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야채 위주의 병원 식단이 입에 맞아 밥 한 그릇을 다 비우는 남편은 매일 다르게 건강이 회복되어가고 있다.

비가 갠 오후, 따사로운 햇빛이 유리창을 통해 병실 가득 퍼졌다. 그 동안 미처 깨닫지 못한 축복의 빛이 아닌가. 외부와 차단된 병실에 있으면 지나온 일상들이 부질없이 허무할 뿐이다.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코 지내온 나날들이 바보같이 느껴지고 우스꽝스럽기까지한지 모르겠다. 항상 한지붕 밑에서 얼굴을 맞대고 아웅다웅 부딪치던 부부가 병실에서 환자와 간병인으로 만나면 처음 인연을 맺었던 때와 같은 첫정이 연민으로 다가와 가슴이 아려온다.

이곳 외과 병동에는 나이든 수술 환자들로 가득했다. 직장암·위암·취장암·유방암·자궁암 등. 환자들을 간병하는 가족들은 남편 아니면 아내들이다. 아픔의 연대감을 운명처럼 지닌 부부는 혈연보다 진한 인연으로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닌다. 질병보다 그 병에 대한 염려 때문에 밤마다 같은 꿈을 꾼다.

옆 침대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직장암 환자는 의사 지시로 아직 입으로 음식을 먹을 수 없다. 본인은 모르는 시한부 삶을 눈치채지 않게 태연하게 간병하는 부인의 모습이 눈물겹다. 주사바늘이 꽂혀 있는 나무토막 같은 팔을 쓰다듬는 아내를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오라고 내쫓지만 그녀는 야산에 가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돌아오곤 했다.

옆방의 유방암 환자 곁에는 그녀의 남편이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시중을 들고 있다. 어린애 다루듯 밥도 떠먹여주고 잠재우고 다독거려주는 남편 사랑이 지극 정성이다. 이따금 출출한지 정수기 앞에서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는 노인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찡하게 가슴을 친다. 산다는 것은 엄숙하고 고귀하기 때문에 슬픈 것인가.

병원에서 만나는 정겨운 노부부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들이 언제 남남이었던가. 서로 참고 부족한 것을 메꾸며 오래 신어서 편안한 신발처럼 되어버린 남편과 아내. 오늘보다 내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의 희망으로 현재의 아픔을 이기면 미래를 향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잃어버린 것보다 아직 남아 있는 것, 아직은 내 인생에 못다한 중요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속삭이는 소리도 함께 듣는다.

창 밖으로 보이는 산이 어느덧 저녁노을에 젖어드는 모습이 애잔하다. 향연을 끝낸 수목들은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생긴대로의 순수한 모습으로 말 없이 서 있다. 서로 적당히 떨어져서 그 사이로 휑하니 바람을 떠나 보내고 있는 나무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바람의 비밀을. 봄, 여름, 가을의 색깔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의연히 찬바람을 이기고 있는 겨울나무들을.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우리 삶에 온전한 만족이 있을까.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 인간적 위대성은 무엇일까. 인생이란 어떤 완결성의 결과이기보다 오히려 결함의 결과라는 사실을 터득할 뿐이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하는 부부란 서로의 빛을 나누어 가지면서 저 저녁노을처럼 사그라지는 오묘한 빛인 것을.

노을빛이 내 가슴으로 묻어온다. 아니 내 가슴의 노을이 산으로 퍼져간다. 적막감에 쌓인 야산을 바라보며 고독의 시간을 음미한다. 가슴에 남겨두어야 할 아무것도 없이 조금씩 나에게서 빠져 나가 바람이 되어 나무를 뒤흔드는 내 욕망과 잡념들. 젊음도 방황도 사랑도 때가 있고 끝이 있는 것을. 그러나 내 뜨겁던 젊은날의 문을 닫아 버리면 그때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무 위에 소복소복 쌓이는 하얀 눈. 따뜻한 솜이불인 양 뒤집어 쓴 두 그루의 겨울나무처럼 우리 부부는 그렇게 같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