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노라 임에게

                                                                                                     엄현옥

 한 구절의 멘트가 주말 저녁의 나를 텔레비전 앞으로 이끈다. 명문 사대부의 선산에 묻힌 기생 주인공은 홍랑이다. 엄격한 신분의 벽이 존재했던 시절, 그들 로맨스에 담겼을 사연이 궁금하다.

젊은 관리 고죽(孤竹) 최경창과 문학적 교양과 미모를 갖춘 홍랑은 서로 마음을 터놓고 시와 풍류를 나누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나 그녀가 당시 관아에 속한 노비나 다름없던 관기였음을 떠올리면 그들 사랑의 우여곡절이 짐작된다. 관리의 임기가 끝나면 관기와의 사랑도 지속되기 어려웠기에 말이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이들의 사랑을 시기라도 하듯 주변의 눈초리는 가혹했다. 그녀는 그런 세간의 질시를 초연히 삭히는 듯 아름다운 시를 남긴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임에게 보내노라’가 아닌 ‘보내노라 임에게’이다. 상대의 반응을 보아가면서 무언가를 보내는 감정의 저울질이 아니라 그냥 보내는 것이다. 400년이 넘는 옛 여인의 저돌적인 열정이 감지된다. 이보다 더한 도치법의 극치가 있으랴. 그러나 애잔한 사랑의 마음에도 여성 특유의 조심성은 담겨 있다. 밤비에 돋아난 새 잎이 ‘바로 나’이기보다는 ‘나인가도’여기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의 뜨거운 마음으로도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신분의 벽을 의식한 애잔함이 전해진다. 이런 섬세함과 강렬함에 고죽이 매료되었던 것일까. 이 연시(戀詩)를 두고 가람 이병기 선생은 ‘한 보배’와 같다고 했음을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다. 그저 읽는 마음에 이는 잔잔한 파문을 즐기면 되는 것이기에.

사랑,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나이를 초월하여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감정의 움직임이다. 사나이로서 이렇듯 한 여인의 애틋한 감정을 받은 고죽은 ‘송별’이라는 시로 화답한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마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그녀와의 이별의 아쉬움이 절절하지만 비구름에 어두운 청산이라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애달파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이성(異性)에게 받은 과분한 사랑을 훈장처럼 장식하기를 즐긴다. 그것으로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버드나무 가지를 자신인 듯 여겨달라는 여인에게, 난 한 포기를 건네는 것으로 위로하고 있다. 여기에는 신분의 차이나 따가웠을 주변의 시선도 그다지 걸림돌이 되지 않았던 듯, 그녀와의 만남과 이별을 기록해 놓은 서첩을 남긴다.

양반가의 남성들만이 문인 계층이었으며, 여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폐쇄적이던 당시 조선 사회에서 당당하게 사대부와 풍류를 나눈 여인들이 있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붙여진 이름은 ‘해어화(解語花)’였다. 선비의 말을 알아듣는 꽃으로만 머물렀던 것이다. 특이한 신분의 벽을 감안하더라도 남성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그저 자신들의 문장과 말을 해독할 수 있는 꽃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 남성들의 시가(詩歌)는 임금에게 바치는 연군가나 백성을 가르치겠다고 읊조리는 훈민가 일색이었다.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을 보라. 그의 임은 임금이었으며, 대부분의 양반들은 도포자락 속에 체면과 양심의 소리를 억누른 채 헛기침으로 일관했다. 여기에 비추어 관기와의 사랑을 드러냄에 주저함이 없었던 고죽은 진정한 자유인이 아니었을까. 그는 홍랑에게 있어 생명과도 다름없었던 사랑을 나눌 자격이 있는 멋진 남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한 사람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지 않은 듯하다. 1576년 봄, 사헌부는 그의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식견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고 북방의 관기와 살고 있음이 원인이었다. 경성을 떠난 고죽이 병이 나자, 7일간을 걸어 찾아온 홍랑의 행동이 이렇듯 비화된 것이다. 마침 국상 기간이었으니 정적들에게는 좋은 표적이 되었음은 뻔한 일이다.

그는 이로 인해 변방 한직을 떠돌다가 객사한다. 당대에 이름을 날린 문장가로서는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이었으나 그 따위 벼슬과 호화스러운 말로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랴. 한 여인의 절대적인 사랑을 나누었으니 진정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초라한 임종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사랑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의 뜨거운 사랑에 비하면 함께 지낸 것은 고작 몇 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소매만 스치듯 아쉬운 몌별(袂別)의 시간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함께 보낸 시간의 길고 짧음이 사랑의 가늠자일 수는 없다.

홍랑은 그가 죽은 후 스스로 얼굴에 상처를 내고 삼 년간의 시묘살이를 한다. 수절을 위해 자신이 택한 최선의 길이었다. 또한 전쟁이 나자 그녀는 그의 작품을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옮겨 보존하였으니, 홍랑에게 있어 최경창은 종교였고, 그녀는 장렬한 순교자였다.

우리 주변에는 사랑이 넘친다. 젊은이의 한 부류는 일회성 감정의 유희를 사랑이라 부르며, 손익 계산을 적절히 짜맞추어 손해나지 않는 감정의 저울질을 지칭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남녀간에 관계된 상업성을 포장하기 위해 ‘사랑’이라 하기에는 민망했던지 많은 것에 ‘러브’를 붙이고 있다. 오늘날 과연 ‘러브’라는 낱말이 붙은 것 중에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몇이나 될까. 동전을 넣은 만큼만의 자동판매기 사랑이다.

조상들의 마음을 담은 옛말 ‘괴다’는, 마음 바닥에 아름다운 그 무언가가 고이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을 것이다. 굳이 오매불망의 숙어를 빌지 않더라도 그리 복잡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최경창이 세상을 뜬 것은 45세였으니 지금의 내 나이와 엇비슷하다. 옛 성인은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했는데, 나는 수시로 무언가에 흔들린다. 비가 내리면 온몸으로 그 비를 맞고 싶고, 흰눈이 펑펑 쏟아지면 그 자리에서 거대한 눈사람이 되도록 기꺼이 눈을 맞고 싶다. 바람만 불어도 휘청거리는 것이다. 그런 내게 진부한 세태를 비웃는 이들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는 소낙비가 내린 뒤의 신선함이다.

스탕달은 그의 연애론에서 정열적인 사랑을 해보지 못한 인간은 인생의 반분(半分), 그것도 아름다운 쪽이 가려져 있는 것이라 했다. 인생의 반쪽이 가려진 나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

 

 

 

엄현옥

한국 문협 회원, 인천 수필시대 회장.

수필집 『다시 우체국에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