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개비는 바람을 모은다

                                                                                                       김영희

 커다랗고 하얀 바람개비가 가늘게 내리는 가을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천천히 바람을 모으고 있다. 솟대처럼 높은 나무기둥 위에 매달린 바람개비 날개가 차 유리를 통해 멀리서도 보인다.

나는 굳이 그 거처를 알고 싶어 고개를 빼고 휘둘러 보았다. 저만치 뒤켠으로 야산을 배경삼아 나즈막한 인가 몇 채. 그 사이에 재활용 센터이거나 고물상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이 있고, 폐품이 가득한 넓은 마당 한구석에 그 기둥이 박혀 있었다. 지저분한 폐품을 모으고 정리하다가 땀 맺힌 얼굴을 들어 바람개비를 바라보는 주인의 눈빛이 보이는 듯하다.

사람이 어디에 서 있던지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솟대만큼 높이 올려 놓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항상 마음이 몸을 따라 하나가 되고 그것을 유족하게 여긴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사람은 마음을 몸 가는 대로 그냥 놔두고 싶지 않을 때를 종종 경험한다. 그럴 때면 목을 크게 젖히고 바람개비를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오래 전에 버스 안에서 본 구걸하던 사나이를 생각한다. 복잡한 내 마음만큼이나 잔뜩 헝클어진 안개가 차창 유리를 덮고 있던 날이었다. 출근 전 딸아이 일로 낯빛을 붉히던 남편의 얼굴이 회색빛 차 유리에 비쳐 보였다. 그때 버스가 멈추고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올라왔다. 그는 버스 안의 손님들에게 분홍과 파랑의 색지 한 장씩을 나누어 주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 사람이라면 몇 번씩 경험했을 도와 달라는 글이려니 여기며 무심히 받아들었다.

파란 종이 위에는 정성을 가득 담은 졸필로 ‘새날’이라는 제목의 자작시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솔직히 말하여 시랄 것도 없는 글귀였다. 깡마른 체구의 그 남자는 근로 현장에서 불구가 되어 좌절 속에 주저 앉아 있다가, 마음을 다스리고 시를 지어, 그것을 상품삼아 버스를 오르내리며 구걸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시가 한순간이라도 사색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사연은 끝을 맺고 있었다. 좌석을 돌며 아까 나누어 주었던 종이를 거두어가는 그에게 동전을 쥐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려주었다. 내 앞에 온 그에게 천원 한 장을 건네자, 분홍 색지 한 장을 더 주며 고맙다고 꾸벅꾸벅 자꾸만 인사를 한다. 내가 베푼 만큼의 대가로 한편의 시를 또 준다는 뜻이었다. 베푼 자의 오만함이 슬며시 일어나 가라앉아 있던 마음을 조금 추스려 주었다. 버스 앞에 버티고 있던 안개도 거의 물러가 있었다.

전에 살던 부천역 앞의 걸인들도 떠올려 본다. 유난히 통행인의 왕래가 많던 역 앞에는 구걸 인파 또한 다양했다. 불경 테이프를 틀어놓고 점잖게 목탁을 두드리는 승려, 검은 안경을 끼고 나란히 서서 찬송가를 부르는 맹인 부부, 계단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연신 절을 하는 초라한 노인, 두 다리가 절단됐는지 자동차 튜브 조각을 길게 이어 길바닥에 펼쳐 놓고는 아예 눕다시피 기대앉은 사나이, 카세트 위로 흘러 넘치던 철지난 유행가, 호객하는 듯한 그들의 야릇한 눈빛이 어른거린다.

일년 열두 달 거의 거르는 날 없이 나와 앉아 그것으로 업을 삼는 강박한 사람들. 그들 중에는 몇 닢 동전일 망정 적선에 감사는커녕 조금 주는 사람에게 욕지거리를 하기도 하고, 생떼를 부리는 구걸행각까지 일삼았다. 더 불쌍하게 보이려고 과대포장을 하여 오히려 반감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 가졌던 측은지심은 점차 빛이 바래고 그것들은 어느 새 내 심장에 한 겹쯤 굳은살이 생겨나게 했다.  

시를 사 달라던 이에게 기쁜 마음으로 값을 치른 까닭은 내가 글을 좋아해서만은 아니다. 아마도 그 사내는 비참한 현실의 고통을 한켠으로 미루어 놓고 고개 들어 시를 바라보기로 한 모양이다. 그 사내의 고개든 모습이 나를 기분좋게 했다.

돈을 벌던지 구걸을 하던지 그 과정 중에 일어나는 온갖 사연들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게도 닫게도 할 수가 있다. 이편의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이(轉移)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무슨 일이든지 피차에 도움이 되도록 할 일이라 여기며 하늘빛 시를 곱게 접어 책갈피에 끼워 넣었었다. 훗날을 그리는 그 사나이의 마음이라 여기며 분홍색 시도 함께 받아들였다.

버스는 벌써 한참을 지나와 바람개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바람개비가 모으는 바람은 그 주인의 가슴도 내 가슴도, 어쩌면 내 책갈피 속에서 잠자고 있는 어설픈 시인의 가슴도 충분히 덥혀 줄 훈풍일 것을 믿는다.

 

 

 

김영희

<한국수필>로 등단(98년). 그레이스 문우회 동인.

동인지 『단감찾기』, 『창으로 바라보는 풍경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