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료작-

신귀족론

                                                                                                         서숙

 A는 모 명문대학의 외국문학 교수다. 그녀는 또한 베스트셀러를 다수 내고 있는 소설가다.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유수(有數)의 번역가이기도 하다. 어느 해인가 그녀는 권위 있는 문학상과 번역가에게 주는 영예로운 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기량을 과시하였다. 세상에는 이와같이 경이롭게도 한 분야에서만 아니라 여러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도 있다. 그녀는 나에게 선망의 대상인데 나보다 나이가 겨우 한 살 많다.

B는 S대학 국문과를 나와 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를 했다. 그런데 두 아이를 출산한 후 고심 끝에 직장을 포기하고 이제껏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나는 그녀가 평범한 아줌마로 안주한 모습이 애석해서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녀는 후회는 없는데 단지 조기 퇴직을 하였기 때문에, 햇수를 채우고 연금을 받는 친구들을 보면 좀 부럽다며 웃었다. 그녀는 현모양처의 전형을 추구하여 적극적으로 소신껏 사는 사람이다. 그녀도 나보다 한 살 연상일 뿐이다.

나도 소위 전업주부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살고 싶어서 전업주부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냥 별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으니까 이렇게 산다. 시거든 떫지나 말 것이지, 모험심도 성취욕도 신통치 못해서, 이십여 년을 한결같이 남편에 얹혀 피부양자(被扶養者)로 살면서도 건방지게 나는 스스로의 사는 모습을 늘 시시하게 여긴다.

그런데 뜻밖에 나를 귀족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나타났다. “중산층 가정의 주부는 우리 나라에서 신흥 귀족입니다. 밖에 나가 돈벌이를 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니 그게 바로 귀족의 신분 아닙니까?” 한다.

그의 주장에 의할 것 같으면 귀족의 개념은 원래 별게 아니고 직접 생산 활동에 종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란다. 게다가 작금의 편리하고 발달한 가전제품의 범람과 아파트라는 주거 환경은 주부들을 가사노동으로부터 대폭 해방시켰으므로 옛날 같으면 하인을 서너 명 두고 사는 폭이라는 것이다.

나는 주부가 놀고 먹는 사람들이라는 그 사람의 시니컬한 주장에 굳이 반기를 들고 싶지는 않다. 여하튼 놀고 먹는 덕분에 갑자기 귀족으로 신분이 격상된다면, 좀더 본격적으로 귀족적인 삶에 대하여 탐구하고 주부로 살면서 항상 짊어지고 다니는 패배의식을 내려놓는 계기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예전에 서양의 귀족들을 대체로 무료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들의 저녁 시간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지극히 지루한 일상이었다고 한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니 당연히 TV도 라디오도 없었다. 그들이라고 허구한 날을 파티로만 지새웠던 것도 아니었다. 할일은 없고 여가는 많았다. 공상으로 보내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계란 노른자로 황금을 만들 궁리도 하고, 밤하늘의 별자리도 쳐다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금술이니 점성술이 발달하고, 오늘날의 화학이나 천문학으로 이어졌다.

오늘날의 주부들은 그러한 면에서 닮은꼴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일상 속에서도 이들은 틈틈이 심심하고 지루하다. 그러니 한가와 여유를 누렸던 귀족들이 역사를 만들고 사회를 선도해 온 것처럼 이들 신흥 귀족도 남아도는 시간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모색해 볼 일이다.

이즈음의 시대정신은 프로페셔널을 지향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면 사람들은 생업에 구애됨이 없이 그야말로 귀족답게 유유자적 이런저런 하고 싶은 일에 손대 보며 살 수 있기를 오히려 더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추어리즘의 미학이라는 근사한 말도 있으며, 질주하는 고속성장에 맞서 느림이라는 것의 성찰도 있다. 이토록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하다는 것은 그야말로 귀족적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아마추어가 가지는 장점은 여러 가지다. 우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골라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누가 책임을 묻지도 않는다. 그저 방관자로 구경꾼으로 여유작작하게 살아가면서 두리번거려 보는 마음이면 족하다.

여기까지 신나게 생각의 갈피를 잡아가고 있다가 갑자기 시들하다. 아무래도 자신의 온전하고 드높은 세계를 구축하고 사는 A나 자기가 선택한 길에 당당한 B의 삶에 상응하는 치열한 정신이 없어서 맥이 빠지는 것이다. 역시 귀족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보다.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다더니, 되지 않은 귀족놀음에 평생직장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하던 주부 자리에서나마 퇴출당할지도 모르겠다.

이때 내가 귀족의 꿈을 꾸는데 일조(一助)한 편리한 가전제품이라는 것들 중에서 대표격인 세탁기에서 세탁 완료의 신호음이 울린다. 세탁기 안에 젖은 빨래를 너무 오래 방치하면 구김이 심하게 간다. 꿈도 너무 오래 꾸면 구겨진 빨래 꼴이 된다. 빨래를 탁탁 털어 줄에 널며 그 위에 나의 꿈도 살짝 얹어 놓고 돌아선다.

 

천료 소감

 

평소 저는 문학에 뜻을 두고 이를 세상에 펼치며 사는 사람들은 참 행복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문학 동네의 한 귀퉁이에 조심스럽게 한 발 들여놓았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무한히 영광되고 가슴이 설렘니다.

문(問), 사(思), 수(修) 세 글자를 가슴에 안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하고 꾸준히 정진하고자 애쓰겠습니다.

제가 <계간 수필>이라는 신천지를 향해 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주신 정봉구 선생님께 성실한 자세로 보답하고 싶습니다.

 

                                                                                                                                    서숙

 

강릉 출생(54년). 경기여고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