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낙서

                                                                                                 金泰吉

 나는 20대 초반에 자유분방한 교풍을 자랑하는 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 교수가 강의를 위하여 교실에 들어왔을 때, 학생들이 피우던 담뱃불을 서둘러 끄지 않고 유유히 연기를 뿜어도 교수는 못 본 척하고 강의를 시작하는 제멋대로의 학교.

교실과 기숙사의 벽에는 낙서가 가득히 들어차서 신입생을 위한 빈자리가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 낙서의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나, ‘청춘’, ‘자유’, ‘진리’, ‘꿈과 사랑’, ‘전쟁과 평화’ 따위가 많았을 것이다. 화장실 벽에도 낙서가 있었으나, 외설스러운 그림이나 글씨는 보이지 않았다. 낙서에도 품위가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일까?

지금도 기억에 정확하게 남아 있는 낙서가 있다. 어느 화장실에서 시선을 끈 ‘사랑이 없으면 어찌하리!’에 나는 막연한 공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지,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인생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과 같겠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낙서의 주인공에 대하여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며칠 지난 뒤에 또다시 그 화장실에 들렀을 때, 나는 또 하나의 낙서가 먼젓것 가까이 추가된 것을 보았다. ‘사랑이 없음을 어찌하리!’ 이 세상에 참된 사랑은 사실상 없다는 비관론이다. 실연의 쓰라림을 체험한 청년의 필적일까? 아니면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에 환멸을 느낀 사람의 체념일까?

나는 세 번째로 그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 자신이 제3의 낙서를 추가하기 위하여 마음먹고 들어간 것이다. ‘사랑은 있다. 주라!’ 이 짧은 말을 되뇌면서 나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러나 내가 별렀던 그 말은 이미 낙서가 되어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발 늦은 것이다. 나는 다만 ‘주라!’ 앞에 ‘아낌없이’라는 수식어 한 마디를 끼워넣고 돌아섰다.

‘사랑은 있다. 주라.’

나 자신의 낙서 문구로 삼으려 했던 이 말의 뜻을 나는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 사랑을 받기만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주고자 하는 뜻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것은 분명히 있다는 생각. 그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일까? 비록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정情이 따라주지 않으면 헛된 의지만 남을 수도 있음 직하다. 그러나 어쩌면 ‘사랑’의 정은 모든 가슴 속에 본래 있을 것 같기도 하여 지금도 알쏭달쏭한데, 20세를 갓 넘은 내가 그때 무엇을 알았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랑을 아낌없이 주라’는 내가 좋아했던 말을 나는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오랫동안 살아 왔다는 사실이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남녀간의 열정도 사랑이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정도 사랑이며, 인간 전체에 대한 동병상련同病相憐도 일종의 사랑이다. 화장실 벽에 쓰여진 ‘사랑’이 어떤 종류의 사랑이었던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다만 낙서한 사람들이 젊은이였으므로 남녀간의 연정을 가리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앞선다. 그 학교 다른 벽 위에 ‘연애지상주의’라는 굵은 낙서가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낙서와 잡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으나, 실제로 연애에 몰두하는 학생들은 적었다. 남녀가 어울릴 기회가 적었던 시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남녀 문제에 대하여 매우 집착하는 젊은이들을 ‘연파軟派’라고 부르며 별로 좋지 않게 여기던 당시의 가치 풍토가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서 크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들떠 있었고, 여자로 인하여 정열을 불태우는 것은 ‘큰 일’을 할 사람의 정도正道가 아니라는 당시의 상식에 나도 묶여 있었다.

 

나 개인으로서는 연애의 길을 빠져들기 어려운 또 하나의 사유가 있었다. 청소년기의 나는, 유교적 가정교육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연애라는 것은 결혼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만 정당성을 갖는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5년제 중학교를 마치고 나는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곳의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했으니, 조선인 결혼 상대를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고, 일본인과의 결혼 가능성을 생각할 처지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인생의 황금기를 무미 건조하게 보냈다는 아쉬움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위해서 도리어 다행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먼 곳에 떼어놓고 바라본 여러 여인들은 신비에 쌓인 아름다움의 화신이었고, 여성의 실존을 우러러보는 자세로 상상한 기간이 길었다는 것은 역시 다행한 경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