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여 있는 불빛

                                                                                                      이종만

 해질녘, 나무가 무성한 아파트 숲길로 접어들었다. 진초록 잎들이 바람 따라 하늘거리는 하루의 끝자락에 산책을 하면 마음이 고즈넉해진다. 며칠 전 TV에서 보았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아픔이 아직까지 애잔하게 마음을 울리는데, 여름은 이미 절정에 와 있고, 나는 계절이 주는 열정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공원을 지나 어린이 놀이터까지 걸어왔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그네나 시소를 타고 있는 몸짓이 귀여워 보인다. 그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저물어가는 허공 속으로 퍼져 나간다. 모래 바닥에 질펀하게 앉아 장난을 하거나 집을 짓고 있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은 언제쯤이면 모래성의 의미를 알게 될까.

날이 어두워지자 아이들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치는 텅 빈 놀이터는 그들이 놀다간 흔적만 남아 있다. 나는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그네에 앉아 힘껏 굴러 본다. 우리네 삶도 그네를 타듯 자기 자신이 밀어 올릴 때만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닐까.

아파트 창문에서는 불빛이 따스하게 새어 나온다. 방금 전까지 여기에서 놀았던 아이들이 돌아간 집, 낮에 보면 공중에 떠 있는 외로운 섬 같은 삭막한 창들이 갑자기 깨어나는 듯하다. 직장에서 돌아온 아버지와 가족이 모여 아이들의 재롱으로 화목한 한때를 보내리라. 한참 창들을 쳐다보고 있자니 나도 그 온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어린 시절, 머슴아저씨는 아침 일찍 소를 몰고 나가면서 외양간 한편에 굵은 새끼줄로 그네를 매달아 주었다. 밖에서 뛰어 놀다가도 심심해지면 나는 그 그네에 앉아 마당 언덕에 수런거리는 대바람 소리를 듣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다가 사방이 어스름해지면 집안은 들에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소리로 술렁거렸다. 방마다 남폿불이 켜지고 그 불빛이 창호지 문으로 새어 나오면 마음이 그렇게 평화로워질 수가 없었다. 그 속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대가족이 저녁을 먹는 모습은 무슨 의식을 치르는 행사처럼 거하게 보였다. 나는 삼촌과 고모에게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반딧불이를 쫓아 마당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철이 들면서 가족이란 불빛을 따라 모일 뿐만 아니라 가족 스스로가 바로 불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고 호화로운 집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아니어도 좋다. 산 밑 외딴 곳 작은 흙집에서 새어 나온 불빛 또한 우리 가슴을 훈훈하게 하지 않던가.

어떤 작가는 ‘가족이란 모여 있는 불빛’이라고 했다. 가족은 함께 있을 때 행복하고 흩어지면 슬픔이 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념의 대립으로 우리 민족은 가족과 헤어져야 했고, 그리워하면서 살아야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인연으로 묶인 사람들, 그토록 소중한 이들이 가슴치며 멍들고 이지러진 지 반세기가 흘렀다. 그러나 새 천년 첫 광복절에 평양과 서울에서는 헤어진 혈육들이 만났다. 전 국민은 TV 앞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우리 민족이 메고 있는 멍에가 이리도 무겁고, 그 고통이야말로 참으로 길다는 생각을 하며 많이 울었을 것이다.

세월은 죽음까지도 용서하는 힘을 지녔는가. 서로의 가슴에 총구를 겨누었던 혈육이 만나 오열하고 있었다. 오십 년의 세월은 홍안의 소년을 주름진 할아버지, 꽃다운 딸은 반백의 할머니로 변하게 했다. 서로 끌어안거나 손을 잡고 감격 속에 엉켜진 모습은 분단된 우리 민족만이 감내해야 할 아픔이었다. 구순의 어머니가 칠순의 아들에게 밥을 떠 먹여 주는 광경은 어찌 이토록 가슴이 아려오는가. 나이가 들어도 부모 앞에서는 자식은 항상 어린애인 것을. 그 자식을 그리며 모진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던 어머니의 심정이 헤아려진다.

그들은 이제 서로의 가슴 속에 등불 하나를 밝혀놓고 긴 이별로 들어가리라. 그리고 많은 세월 그 불빛에 의지한 채 살아가게 되리라.

그네에서 내려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지만 지상의 불빛으로 가슴이 훈훈하다.

 

 

 

이종만

<수필공원>으로 등단(93년).

수필산책회, 산영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