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된 죽음

                                                                                                        주연아

 인간의 최대 그리고 최고最古의 화두는 무엇일까. 역시 영생의 문제가 아닐까. 오천년 전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도 영원한 삶을 찾아 길을 떠나는 사람에 대한 글이 있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를 보면 수메르인들의 도시 국가인 우루크(Uruk)의 왕 길가메시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위대한 왕이었으나 어느 날 사랑하는 친구인 엔키두의 죽음을 겪는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이 불가항력적인 한계에 대한 반항으로 유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영원한 생명을 찾기 위해서. 그러나 역시 운명의 끝은 죽음임을 인정하고 돌아온 그를 우리는 비극적 영웅이라 부른다.

죽음이 사라져 영원한 삶이 허락된다면 인간은 저 원초적인 비극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런데 21세기의 다리를 넘어선 지금 우리의 귓전을 때리는 저 가늘지만 간절한 목소리는 무엇인가. 이제는 그만 죽고 싶다는 저 절실한 목메임들은 안락사의 승인 여부와 함께 삶에 지친 노인들의 자살을 위한 약을 합법화하자는 움직임을 부르고 있다.

나는 모른다. 삶의 테두리 바깥으로 밀려나,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이 소외된 존재들의 고통을 어떻게 안아 주어야 하는지를. 자비로운 살인인 안락사와 자살 약을 허용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그러나 이런 움직임들은 이제 우리가 생명을 양이 아니라 질로서 측정하고 있으며, 생명에 관한 우리의 관념도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나는 기억한다. 죽음을 갈구하는 어느 깊은 외침을……. 나는 잊지 못한다. 죽음을 초대하여 정중히 맞이하는 한 생명의 마지막 모습을…….

아흔여섯의 외할아버지는 촛불이 닳아 없어지듯이 그렇게 소멸되어 가고 있었다. 화로 안의 불씨가 점차 사그라들듯이 몸 안의 기운을 대지의 큰손에게 그저 내어주고만 있었다.

고요 속의 평안, 그것은 어느 날 칠십된 외아들의 암 발병으로 무참하게 깨어지고 만다. 아들을 앞서가야 한다는 염원과 불러도 오지 않는 죽음에 대한 원망으로 앙상한 겨울 삭정이가 된 그분은 누워서 하염없이 울고만 계셨다.

이제는 그만 죽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시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저분이 한때 일제에 항거하여 감옥을 가신 패기찬 인텔리 문학도였단 말인가. 저분이 과연 외할머니를 설레게 하던 수려한 용모의 그 청년이었단 말인가. 바로 저분이 여든여덟 미수 때 “할아버지, 애인 있으세요?”라며 장난치던 나에게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응, 있다. 지금 예순 살이다” 하여 외손녀를 황당하게 만드셨던 그 로맨티스트였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여든 이후의 삶에도 달콤쌉싸름한 초콜릿과 쫄깃쫄깃한 인절미의 맛이 적당한 비율로 배합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정체 모를 안도감이 야릇한 안개처럼 퍼져가게 하셨던 바로 그분이란 말인가.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 나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참척慘慽의 고통은 견딜 수 없고 희망 없이 사는 날들이 너무 지루해 빨리 떠나고 싶다며 애소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불현듯 쿠마의 무녀가 떠오른다.

아폴로 신에게서 손안에 든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은 햇수의 수명을 허용받았으나 그만큼의 젊음도 달라는 청을 잊고 안했기 때문에 늙고 쪼그라들어 조롱 속에 매달린 채 아들의 구경거리가 된 무녀, 소원이 뭐냐는 아이들의 말에 이제 그만 죽고 싶다고 말하는 그 무녀. 이곳은 결코 조롱 속이 아닌데, 빙글빙글 맴돌아도 사방이 널찍한 집인데 왜 엘리엇의 장시인 ‘황무지’에 등장하는 무녀 시빌레가 겹쳐 보이는가.

문득 내 코를 스치는 한 인간의 생이 삭아가는 냄새 그리고 또 존엄성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

할아버지는 외삼촌의 수술 하루 전날 눈을 감으셨고, 그분을 가슴에 묻으며 돌아선 우리는 아무도 울지 않았다. 그 길은 진정 그분이 원하셨던 길이었기에. 죽음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이 아니라 고대하고 기다리던 초대받은 귀한 손님이었기에.

당신의 시 ‘사월’의 시구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계절 사월에 꽃이나 한가지 들고 거나한 기분으로 고향에 가듯, 하직의 인사도 그럴듯하게 가신 할아버지. 지금쯤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면서 쪽배에 오르셨겠지. 죽음과 동행하여 서으로 서으로 노를 젓고 계시겠지. 신을 가지지 않았던 그분은 신의 영접을 담보로 아들의 생명을 간구하며 죽음과 타협을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무엇을 쫓고 있는지. 일생을 허겁지겁 달리며 손에 움켜 쥔 것은 한 줌 바람 그리고 꿈속의 또 꿈, 손을 펼치면 눈을 떠 보면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바람같이 왔다가 구름같이 가네,

구름으로 뜨다가 바람으로 사라지네,

아무것도 없네, 아무것도 없네.’

 

시詩 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놀랍게도 욕심이 없으셨던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없음’의 비밀을 나에게 가르쳐 주고 가셨다. 그것도 보통이 아닌 초특급인 금빛 비밀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게 되면, 죽고 싶다고 애소를 하게 될지 살고 싶다고 절규를 하게 될지를…….

그러나 내가 살 만큼 살아 먼저 간 이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질 때 먼지 낀 창틀 너머로 희미하게 비치는 추억들을 바라보며, 그 추억 속에 갇혀 있는 수많은 영상들을 떠올리며 조용히 목례를 드리고 싶다. 찾아온 죽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