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용묵(桂鎔默)의

' 낙관(落款)'

 

일  시 : 2001년 5월 19일

장  소 : 수필문우회 회의실

참석 인원 : 문우회 회원 27명

사  회 : 허세욱

정  리 : 권일주

 

사회 : 안녕하십니까. 우리 잡지 제25호, 2001년도 가을호를 위한 합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합평회의 대상 작품은 30년대에 일찍이 ‘백치 아다다’로 잘 알려진 계용묵 님의 ‘낙관’이라는 수필로 선정했습니다. ‘낙관’은 1955년에 출판한 계용묵 선생의 유일한 수필집인 "상아탑" 속에 수록된 것으로, 1941년 12월 <조광> 잡지에 발표했던 것입니다.

먼저, 이 작가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분은 1904년 평북 선천 남면에서 출생하여 1961년 별세할 때까지 57년의 생애 가운데 36년을 작가 생활에 바쳤습니다. 학력을 보면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후 상경하여 중동 중학교와 휘문 고보 그리고 일본 동양대학 동양학과를 다닌 적이 있습니다만, 모두 중퇴한 것이 공통된 점입니다. 그 외에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것이 이분의 학력 가운데서 오히려 장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력은 출판사 기자와 잡지 발행인으로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1938년에 조선일보 출판 기자로 활약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 뒤 1945년에는 정비석 선생과 함께 <대조大潮>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에는 다시 김억 선생과 <수선사>라는 잡지사를 설립하여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신문화>라는 잡지를 잠시 발간한 적이 있습니다.

이분의 창작 경력을 보겠습니다. 1925년 단편 ‘상환’이 <조선문단>에 발표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습니다. 그 후 1927년에 ‘최서방’이 <조선문단>에 실렸고, 다시 1935년에 이분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단편 ‘백치 아다다’가 같은 잡지에 실렸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자료를 가지고 통합해 보았더니, 이분의 작품은 단편이 50여 편, 수필이 약 40여 편 되었습니다. 이 수필들은 아까 잠시 말씀드린, 1955년에 출판된 왊燦팍풛 속에 34편이 들어 있고, 1955년 이후에 약 7, 8편이 발표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1935년에서 1940년 초반에 이분의 수필이 거의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토론을 위해서 박재식 선생님을 비롯하여 고임순 선생님 그리고 고봉진 선생님과 안인찬 선생님, 이렇게 네 분을 모셨습니다.

네 분께 먼저 숙제를 드리면, 첫번째 이 글의 주제를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까지 해온 작품들과 비교할 때 약간 다른 주제가 잠겨 있는 듯합니다. 그 다음 이 글의 구성과 기교상의 특색 그리고 이와 같은 수필의 창작 방법에 대한 평가를 해 주십시오.

오늘은 정부영 선생께서 낭독해 주시겠습니다.

 

 

(본문)

 

落 款

 

서화書畵를 좋아하는 어떤 벗이 하루는 어느 골동점骨董店에서 추사秋史의 초서병풍서草書屛風書 여덟 폭을 샀다.

“나 오늘 좋은 병풍서 한 틀 샀네. 돌아다니면 있긴 있군!”

그 벗은 추사의 병풍서를 구하게 된 것이 자못 만족한 모양이다.

“돈 많이 주었겠군. 추사의 것이면…….”

“아아니 그리 비싸지도 않아. 글쎄 그게 단 50원이라니깐 그래.”

추사의 병풍서 한 틀에 50원이란 말은 아무리 헐하게 샀다고 하더라도 당치않게 헐한 값 같으므로,

“그러면 추사의 것이 아닐 테지. 속지 않았나? 추사의 것이라면 한 폭에도 50원은 더 받아먹겠네.”

하고 의심쩍게 말을 했더니,

“괜히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는구만. 마루 병풍을 붙였다가 뗀 것인데 그 글씨 폭은 지지리 더러워지고, 가장자리루 돌아가면서 붙였던 눈썹지 자리만 하얀 자국이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게 옛날 게 분명한 게야” 한다.

이 소리에 나는 더욱이 그 글씨가 의심스러웠다.

“이즘 고물인 것처럼 그런 가공들을 해서 많이들 팔아 먹는다는데 그 눈썹지 가장자리가 하얗다는 것과 50원이란 헐한 값과를 미루어 보면 글쎄 그게 추사의 친필이라고……?”

“아아니! 그렇게만 자꾸 의심할 게 아니라니깐. 내게 추사의 필첩筆帖이 있는데 거기에 찍힌 낙관落款과 이 병풍서에 찍힌 그것과 조금도 틀림이 없거든.”

하고 그는 틀림없는 추사의 친필로 단정을 하고 조금도 의심하려고 않는다. 그러니 나도 확실히는 모르면서 아니라고 그냥 우길 수는 없어서,

“그럼 글씨 전문가에게 시원스럽게 한 번 감정을 받아 보지?”

하고, 나도 사실은 그 진부가 궁금해서 이런 제의를 했더니,

“그야 어렵지 않지. 그럼 내가 가서 한번 감정을 받아 보겠네.”

하면서 그는 현재 생존해 있는 모모씨의 글씨도 여러 폭幅 샀던 것을 추사의 것과 아울러 다 싸가지고 어느 서도書道 대가大家를 찾아가서 감정을 받기로 했다.

내 의심이 틀림없이 맞았다.

추사의 것뿐만 아니라 현 생존자의 것들까지 진짜 친필은 하나도 없다고 그 대가는 말하더란다.

그러면서 추사의 글씨를 가지고 하는 말이, 추사의 글씨를 방불케 하는 것으로 솜씨는 오히려 추사보다 능숙한 데가 있어 보이나, 도장圖章이 추사의 것이 아니니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란 말을 하더란다.

그래서, 이 글씨가 추사의 글씨보다 낫다면 추사 이상의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어찌 글씨의 능能·불능不能으로 가치가 있게 됩니까? 이왕 얻은 그 필자의 명성 여하로 글씨의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지요. 낙관이 추사의 진짜 낙관이어야 값이 나갑니다.”

하고, 추사의 글씨보다 오히려 나은 점이 있다고는 하면서도 그 대가는 그 글씨를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이 더 더듬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밀어 던지더란다.

하필 글씨에 있어서 뿐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이렇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새로이 잘한다는 것이 이미 얻어가지고 있는 그 명성을 누르기 힘든다. 확실히 그 가치의 판단에 명철한 두뇌도 그 명성 앞에서는 눈을 감는 게 상례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자라난 그 명성의 그늘 밑에선 흔히 새싹이 마음대로 오력五力을 펴지 못하고 시들어버리는 예를 보아도 오거니와, 이 가짜 추사가 추사의 글씨보다 자기의 것이 분명 낫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러면서도 추사의 이름으로 글씨를 써서 팔아먹지 않아서는 안 된다면 그 창조력創造力 고민이 얼마나 클 것일까? 생각을 하며,

“추사의 글씨보다 능숙하다니 잘 보관해 두게. 그 사람이 출세하면 그것도 만 냥짜리는 될 테니.”

하고 웃었더니.

“보관이 다 뭐야! 거 참 흉측한 노릇이로군!”

하고, 그 벗은 그 글씨 뭉치를 아무러한 미련도 없이 다시 보자기에 싸더니 골동품점으로 가지고 나가서 이조자기의 화병花甁 한 개로 바꾸어 왔다.

그 벗 역시 그 추사의 글씨에 혹해서 그 글씨를 사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 글씨 필자의 명성, 다시 말하면 추사의 명성을 사려고 하였던 한 사람인 것을 알 수가 있었다.

(1941년)

 

 

 

 

사회 : 감사합니다. 먼저 주제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압축을 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박재식 : 한 마디로 말씀드린다면, 부조리한 세태에 대한 풍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두 가지를 들어 풍자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가짜 골동품 거래를 통해서 불신적인 사회풍조를 이야기하려 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와 관련해서 기득권이 갖는 불합리한 권위와 그 권위에 맹종하는 세태의 부조리한 풍조에 대한 풍자입니다.

고임순 : 실력보다 명성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을 비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력 있는 신진 작가들이 기존 작가의 명성에 눌려 발전하지 못하는 현실적인 서화, 예술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 그러니까 풍자라는 의미에서는 박선생님과 같은 의견인데, 고임순 선생님은 명성을 중요시하는 풍조를 풍자한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고임순 : 네, 그렇습니다.

고봉진 : 주제라기보다 이 글의 중요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볼 때, 두 분이 말씀하신 것이 다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안인찬 : 저는 추상적으로 주제를 뽑아서 생각하기보다는 이 작품 속에 나타나 있는 말로, 어떤 것이 가장 중하게 강조되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이 작가가 낙관, 혹은 명성이라고 표현한 것의 위력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꼬집으면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작품 전체가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었더니 이번에는 명성을 얻지 못한 재주꾼의 창조적 고민이며, 창작 고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읽는 독자로서의 고민도 생겼고, 무언가 생각해 볼 여지가 더 많았습니다.

 

사회 : 명성을 얻지 못한 예술가의 창작 고뇌라는 말씀이군요.

대체로 형식이나 구성은 특수하지만 여기에 잠겨 있는 주제랄까, 혹은 중요한 내용은 이렇게 좁혀졌습니다. 혹시 다른 시각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없으시면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상床 위에 어떤 물건을 올려놓을 때는 대개 어떤 문제에서 시각이 달라질 것이라는 예상이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지금부터 토론할 구성 문제가 재미있게 나올 것 같습니다. 소설가가 쓴 수필인 이 작품은 구성상, 수사상, 기교상 상당한 특징이 있습니다. 안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안인찬 : 저는 구성과 기교는 내용과는 다른 외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볼 때 내용보다 구성이나 기교에서 성공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야기가 대화체로 엮어졌기 때문에 속도감 있게 진행되어 짤막한 단막극이나 산뜻한 삽화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고 지루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용 전체를 보았을 때, 이 글은 보통 사람들이 지나치기 쉬운 무엇을 보여 주지 못했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고민한 흔적도 없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 뭐, 하는 생각이 들 뿐 내용에 감동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사회 : 대강 말씀은 이 글의 외형적 구성은 속도감이 있고 명쾌감이 있어서 선명한 그림을 보듯 성공적이지만, 내용 속에는 고뇌의 흔적이 없어 보인다는 말씀이군요. ‘낙관’의 전문가이신 고임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임순 : 저는 이 글을 읽으며 작가가 현재 살아 계신 분이라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현재도 이런 문제가 많습니다. 이 글을 쓰신 것이 1941년이면 지금부터 60년 전인데, 그만큼 오래 전의 글같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내용이 선명하고, 구성을 대화체로 엮어가면서 쓴 깔끔한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수필가들이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쓴다든가, 무형식 구성이라  했는데, 이런 단편 작가다운 구성도 공부할 만한 구성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약간 인위적으로 짜여진 듯한 구성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회 : 조심스러워서 제가 다시 한 번 요약을 해 보겠습니다. 문장에는 현대감이 있고 구성도 대화체라서 호감이 가지만 다소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데가 있다. 선후가 당착된 데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고임순 : 네, 그렇습니다.

박재식 : 이 글에는 두 가지 줄거리가 담겨 있다고 아까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글의 구성으로 볼 때, 전반을 차지하는 중요 내용은 사회의 불신 풍조입니다. 그리고 후반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은 기득권자와 민중에 대한 부조리한 전형, 모순을 꼬집은 것입니다. 그런데 뒷부분에 가서 가짜 글씨가 진짜보다 낫다는 소도구 장치를 했습니다. 이것은 구성상에서 볼 때 기막힌 구성입니다. 작가는 이렇게 구성상에서 반전을 시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이야기를 절묘하게 조합시켜 수필을 빚어낸 것입니다. 안이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구성의 기교는 기막힙니다.

고봉진 : 선인을 폄하하는 것은 좋지 않고 또 좀 외람됩니다만, 저는 반대 입장에서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계용묵 선생님은 머리가 나쁘신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의 소재는 잘 잡았는데, 구성에서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낙관이라는 것에 대해서 작가 자신이 정리를 잘 못하고 쓰신 글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의 결론은 가짜 글씨가 추사보다 낫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명성을 보지 말고 그 글씨 자체를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 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남의 이름을 도용하고, 남의 글씨체를 흉내내어서 쓴 글이나 글씨가 좋을 리가 없습니다. 글이나 글씨라는 것은 그것을 쓴 사람의 구체적 삶이나 생애와 분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용묵 선생님은 낙관이라는 것에 대해 한 마디를 하고 싶기는 한데, 그것을 옳게 정리를 못하고 이런 글을 쓰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또 이 글은 스타일이나 문체로 볼 때, 대화가 있고 지문이 있는 소설 문체입니다. 그러나 수필에서 대화체가 많이 들어가는 경우는 그것이 거기에 들어갈 만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때는 좋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화체를 가능한 피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간해서 성공하기가 어렵고, 글의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 저도 머리가 나쁜지 요약하기가 어렵습니다만, 두 가지 이야기를 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는 대화체는 쓸 수 있되 성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대화체는 수필의 격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범 창작관을 이야기했고,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내용에서 가짜 그림은 원래 예술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계속 논란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아예 대상으로 삼을 거리가 아닌 것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 아니냐, 이런 말씀 아닙니까?

고봉진 : 예, 그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박재식 : 고봉진 선생의 생각이 건전한 생각입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추사의 가짜 글씨나 만들어 파는 사람의 글씨가 어떻게 추사의 글씨를 능가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저도 듭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 계용묵 선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 추사의 가짜를 매개체로 해서 이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득권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 문단, 예술 사회의 부조리를 풍자하기 위해서 추사의 가짜 글씨와 또 그 가짜 글씨가 추사의 것보다 낫다고 하는 장치를 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장치로서 그것을 선택한 것이지요.

고봉진 : 장치로서 선택한 것이라면 더더욱 잘못된 것이지요. 자기가 말하려 하는 것, 즉 왜 사람들이 명성에 기우는가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라면 소재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 수필의 구성상 어떤 소재도 권리가 있고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끼어들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유독 가짜 글씨나 그림은 안 된다고 하는 말씀은 약간 문제가 있는 듯이 보이는데요.

고임순 : 저는 수필에서 대화는 풀어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글의 제목이 ‘낙관’입니다. 낙관이라는 것은 글씨와 작가가 동일인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이 글은 글씨를 아무리 잘 썼어도 낙관이 그 사람 것이 아니어서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실력보다 명성에 짓눌려 있는 신진 작가들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유경환 : 저는 이 글의 구성, 기교상에서 친구는 가공 인물이며, 가상 인물이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친구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소설로 구성하지 않고 수필로 구성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작가이기 때문에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친구라는 인물을 가공, 가상 인물로 설정한 것이지요. 소설로서는 호소, 고발, 비판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필로 택한 것입니다.

그 이유 두 가지를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기존이라든가, 기성이라든가 하는 것에 대한 도전이 쉽지 않다라는 자기 의견을 이 작품 속에 깔아놓은 것을 보면 establishment가 누리는 기득권, 권리에 대한 기득권만이 아니고 권위에 대한 기득권, 즉 모든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 아무리 순수하다 하더라도 힘들다 라는 것을 표현으로 커버할 수 있는 수필의 형태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명성이라는 것이 모든 심사 기준이나 가치 판단, 또 판단의 준거가 되어 있는 예술, 문화 풍토에 대해 고발을 하고 싶어서 이런 수필 구성 방법으로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935년에서 1941년까지 5, 6년 동안의 우리 문단 풍토와 그 때의 병리 현상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을 그냥 수필로서만 본다면 짜임새가 엉성하고 대화가 왜 이런 식으로 나오느냐 하는 이야기가 충분히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이 수필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작가이기 때문에 이런 형식을 취한 것이고, 오늘날 이런 하자가 발견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봉구 : 작가가 무엇을 쓰려고 했는가 하는 것을 떠나서 우리가 수필을 쓰는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흔히 소설 같은 수필, 시 같은 수필을 써 보고 싶어합니다. 이 글은 바로 소설 같은 수필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비록 이 글이 60년 전에 쓴 글이기는 하지만, 대화를 이런 식으로 쓰면 안 된다고 느낀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하고 했더니, ~하고, ~하면서, 하는 식으로 위의 대화를 받아놓고 곧장 대화체가 들어갔는데, 이런 것은 지문으로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대 수필을 쓰는 시각으로 볼 때 기교적인 면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사회 : 우리가 지금 토론하고 있는 이 제목과 아주 상등하고 개척 적인 논문들이 몇 편 있어서 살펴보았습니다.

김영화라는 분은 <현대문학> 19 75년 9월호에 ‘소설의 수필화’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계용묵의 소설을 보면 작가적인 안목이라기보다 수필가적인 안목으로 썼다. 왜냐하면 계용묵의 많은 소설을 보면 거의가 피동적인 인간상이며, 소설의 구성에서 심화하는데 실패한 작가이다. 관조적인 수필가라는 말이 계용묵에게는 맞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1982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생들의 연구에 의하면 계용묵은 소설과 수필의 기교가 유사하다. 소설과 수필 양면에서 동일한 장면이 출현한다. 수필의 내용이 소설로, 소설의 내용이 수필로 변용된 것이 일곱 군데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숙명여대의 연구 논문에서는 계용묵이 가진 세 가지 의식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즉, 전통 윤리, 인간 회복, 사회의식이 그것인데, 이것 역시 우리가 여기서 말한 것과 선후가 맞는 것 같습니다.

또 우리 나라의 대 작가 가운데 정비석 씨는 계용묵을 가리켜 ‘청빈거사’라 했으며, 김용선 씨는 ‘강직이 미덕’이라 했습니다. 이 수필, ‘낙관’과 연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러면 세 번째 문단으로 넘어갑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토론을 거치면서 대략 두 가지 공통점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소설적인 구성법이며, 또 하나는 대화체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특성을 지닌 수필이 오늘날 우리의 문단에 시사하는 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고봉진 : 평소의 생각도 그러합니다만, 이것을 읽고 더욱더 글 쓰는 사람의 책임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을 향해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모르는 것은 절대로 쓰면 안 되는 것이며, 자신의 내부에서 잘 정리된 것을 가지고 써야 합니다. 이 글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소재는 괜찮아서 논의를 잘하면 좋은 것을, 엉뚱한 길로 빠졌습니다. 반면교사로서 이것을 통해서 이것이 왜 수필로 실패했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외에도 이분의 여러 작품이 논의점을 옳게 찾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어 있었습니다. 다 읽어 내는데 인내심이 필요한, 시시하고 설득력이 없는 수필이었습니다.

 

사회 : 그러나 ‘낙관’이라는 작품이 수필로서 실패작이라고 말할 때는 상응하는 배경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소재와 해석 문제를 들었는데, 그렇다면 이런 것이 소재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고봉진 : 아닙니다. 소재는 좋습니다. 그러나 풀기를 잘못했다는 말입니다.

 

사회 :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작가의 소재 운용은 영원한 권리요 영원한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계용묵 선생이 왜 낙관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썼느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말할 것이 못되는 것이 아닙니까? 다만 그러한 제목과 효과가 얼마나 맞아 떨어졌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봉진 : 제 말씀은 왜 낙관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썼느냐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작품 속에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좋은 해석을 해 주시는 분들의 그 ‘좋은 해석’이 되는 의도로 계용묵 선생이 이 작품을 쓴 것이라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이지요.

김진식 : 저는 낙관이라는 것이 충분히 제목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글 앞의 전제에서 서화라는 것은 글씨의 능, 불능만으로 분별할 것이 아니다, 가짜는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낙관이라는 원의와 서화의 그것이 상호 의존 관계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 글은 그 의존성과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성, 그런 것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박재식 : 현역 우리 수필가의 센스로 본다면 이것은 잘쓴 수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허술하고 대화체도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수필에 대화체를 쓸 때는 그것을 빼버리면 다리가 하나 빠진 것처럼 부자연할 때, 그렇게 요긴할 때뿐 입니다. 될 수 있으면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도 대화체가 이 작품에 물을 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줍니다. 이런 패턴은 권할 것이 못됩니다.

고임순 : 저는 이 글이 ‘낙관’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를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 수필가들이 연구할 문제는 대화를 산문 속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안인찬 : 예전에는 대부분의 수필집들이 두툼했었는데 현재는 얄팍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오늘날 사람들의 성향에 비추어 볼 때, 이렇게 짤막하면서도 속도감 있고 산뜻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시도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글 속의 구체적인 대화 한두 개나 연결을 보면 문제도 좀 있지만, 전체 틀로서는 전체가 다 이런 식으로 써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긍정적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작은 것이지만 대화 처리를 하는데 있어서 이 글의 뒷부분에, ‘보관이 다 뭐야! 거 참 흉측할 노릇이로군!’이라는 표현이 나왔는데, 가짜로 밝혀진 것을 ‘흉측한 노릇’이라고 표현한 것이 맥이 빠진다고 해야 할지, 부끄러운 일이라고 해야 할지, 이 정도의 작가분이라면 보다 좋은 말로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흉측한 노릇이로군!’이라고 한 것이 너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고, 또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응백 : 낙관이라고 하는 제목을 붙였으면 그 초점에 글이 맞추어졌어야 하는데 아까 정봉구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처음에 맞는 것이라고 하던 것이 뒤에 틀렸다고 말을 하려면 왜 틀렸다고 하는 것인지 해명이 있어야 하고 언급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낙관이라는 제목을 살리기에는 좀 미심쩍습니다. 종이라든지, 거기에 사용한 인주가 문제라든지 하는 구체적인 언급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대화체 문제가 나왔는데, 이 글은 전체적으로 세련이 덜 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한 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김태길 : 별다르게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합평할 작품을 고를 때 허세욱 교수가 계용묵 선생의 글 세 편, 즉 ‘구두’, ‘노인과 닭’, ‘낙관’ 가운데 하나를 골라 이번 합평회에 올리자고 했습니다. 그 때, 그 가운데서 그래도 ‘낙관’이 가장 허구성이 적은 것 같아 이 글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읽어 보고는 이 글에도 허구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디서 그걸 느꼈느냐 하면, 글씨가 추사 것과 흡사한데 더 낫다고 어떤 대가가 말했다는 부분입니다. 그것이 어떤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추사의 것과 비슷한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추사의 것보다 더 나은 글씨를 쓰는 사람이 그렇게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까 유경환 선생이 말한 대로 이 글은 허구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나는 허구라는 인상이 강하다는 점을 나무라는 것은 아닙니다. 수필과 허구 문제는 자주 나오는 것인데 여기서 또 나오게 되었습니다만, 확실히 허구를 섞으면 허구가 섞이지 않은 것보다 평가가 조금 떨어집니다. 그러나 과연 허구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과 나눈 말을 인용했을 때 그 말이나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이 아주 정확할 수는 없는 것이거든요. 자기는 허구가 아니라고 썼어도 실제로는 거짓말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볼 때 그렇다면 과연 허구 중에서 허용할 수 있는 범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이 글을 읽고 생각한 것은 예술을 평가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글씨 자체는 추사를 능가한다, 그러나 낙관이 잘못되었으니까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서예에는 반드시 그렇습니다. 이완용이 글씨 자체는 명필입니다만 그의 글씨는 값이 안 나가고 그 밖의 명사, 안중근이나 김구 선생 등 그런 분들의 글씨는 높이 평가를 받습니다. 이와 같은 서예의 평가 기준이 수필에서도 적용이 되는가 하는 것과 명사의 글씨의 평가가 예술 자체에 대한 평가인가, 아니면 인품이나 희소가치에 대한 평가인가 하는 것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수필의 평가에서도, 그 글을 쓴 사람이 지위가 높다든지 대통령을 지냈다든지 하면 평가를 높게 하고, 무명인 경우에는 수필 자체는 잘 되었어도 평가가 떨어진다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도 좀 가졌습니다.

요즈음 미당의 시에 대해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미당이 권력지향주의였고 친일도 했다, 즉 행적이 깨끗하지 않았으니까 그 시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것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는 것과 그리고 시는 시로 보아야지 행적과 연결시킬 필요가 없다는 견해와의 논란입니다만, 이렇게 대립되는 의견은 오랫동안 그치지 않는 문제입니다. 여기서도 이 문제를 느끼게 했습니다.

고봉진 :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덩어리가 되어 작품으로 나타났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 : 고맙습니다. 오늘 마침 합평회가 끝난 후 행사도 있고, 시간도 이미 한 시간 반이나 끌어왔기 때문에 여기서 오늘 합평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은 ‘낙관’이라는 제목의, 하마터면 잊을 뻔했던 30년대의 작가 계용묵 선생의 수필을 합평에 올렸습니다. 이 제목에서 떠오르는 것은 낙관이라는 것은 진위의 개념에서 자기의 것, 즉 진짜라는 것을 사회에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만큼 가짜가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것은 우리 수필계나 범 예술계에서도 뭔가 암시하는 그런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 몇 가지 의의가 있는 것은 60년 전에 이렇게 대화체를 넣어 수필을 썼다는 점입니다.

이 수필의 주제는 상당히 명쾌했습니다. 다시 요약하면 당시 기성계급과 기득권이 횡행하는 사회, 명성을 중시하는 그런 풍토에 대한 풍자입니다.

구성에 대해서는 시각의 차이가 상당히 보였습니다. 우선, 소설적인 대화체를 써서 현실감과 속도감, 명쾌감을 주는 점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칫하면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는 대화가 너무 많다는 지적이 있었고, 내용에 약간의 허구가 가미되어 있다, 그 외에 부적절한 예가 있다, 산만한 구성이다 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습니다.

이런 글이 우리 산문계에 시사하는 점이 무엇인가 함에도 서로 다른 의견을 보였습니다만, 마땅히 이런 소설적인 대화체가 권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성공이 어렵기 때문에 보다 연마한 후에 이런 글이 나와야겠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벌써 더워지는 날씨에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