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 끝의 늦여름

                                                                                                        이미연

 무더위 뒤끝인지라 에어컨 바람만으로는 쾌적하지 않았다. 시절이 지나서 수영장들은 문을 닫았다. 그러나 목 뒤로 흐르는 땀은 그치지 않았다. 자동차 안은 뜨거운 햇빛이 내리 쪼이고 얼굴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대도 바람이 닿은 곳만 조금 시원할까 온몸이 끈적끈적하다. 시내에서 하던 일이 끝난 우리 부부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서울 근교에 위치한 서오릉에 들르기로 하였다.

나무 밑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이라도 기대한 것이었다. 또 땅을 밟고 계절의 변화를 느껴 볼 수도 있다는 희망도 가졌다. 푸름이 짙어 초록은 검은색을 띄고 하늘은 반 이상이 빽빽한 소나무로 덮었건만, 바람도 없이 찜통을 연상시켰다. 그늘을 찾아 시원한 것을 입에 넣으면서 연신 바람을 기대해 보건만, 꿀 냄새를 맡은 듯 벌들이 얼굴에 달라붙어 문득 집에 가고 싶었다.

막 일어서려는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선뜻한 바람이 불었다. 드디어 시원해지려나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하늘을 바라보니 산 너머 저 끝이 검게 변했다. 해는 남아 있는데도 하늘이 검게 덮여지기 시작했다. 마음은 집으로 돌아갈까 망설이는데 발길은 어느 새 눈에 띄는 정자각으로 향했다. 돌계단을 뛰어 올라 처마 밑에 서고 나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은 서둘러 능 밖으로 길을 서둘렀고, 다른 이들은 뛰어서 처마 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금세 지나갈 듯 보이는 비구름을 피하는 심정이라 모여 있는 이들은 참새마냥 재잘거렸다. 벽이 없는 공간으로 여름철 소나기가 소리치며 내렸다. 엷은 빗방울이 바닥에 있는 돌에 떨어져 잘게 부수어지며 바람을 타고 안쪽과 바깥쪽 구분 없이 뿌려졌다. 다리와 머리에 방울방울 이슬이 맺힌 듯 매달렸다. 바람까지 불어 대니 에어컨이 없는데도 시원했다. 시간이 지나자 시원함을 지나 약간은 으스스 떨리기 시작했다. 양 팔을 껴안듯 감싸 안으며 쓰다듬으며 한기를 쫓아 보고 있었다.

눈을 바깥쪽으로 돌리니 아까까지 더운 기운과 지루함을 지녔던 나무들 사이에 무언가 일이 생긴 듯했다. 그들 사이에서 불어 대는 바람을 타고 시원한 빗방울로 만찬을 차려낸 듯싶었다. 가만히 서 있는 나무들은 새롭게 옷을 입고 성장을 하였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옆에 서 있는 소나무에게 속삭이며 팔을 뻗어 한 무리가 되었다. 그들이 모여서 만든 소나무 군락과 붉은색의 나무 기둥이 하얗게 포말을 만들어 내는 물안개 속에서 바람을 타고 조금씩 움직인다.

눈에 띄지 않게 살그머니 움직여주는 나무들의 흔들림 군청색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설 주인공처럼 비를 맞으며 팔을 벌려 하늘을 향한 채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싶었다.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춤추기를 즐겨서 엄마를 졸라 7년을 배웠었다. 이런 무대라면 어릴 때만큼의 실력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은 날개를 펴고 하늘을 향했다.

남편은 무표정한 채 옆에 앉아 있고, 재잘거리던 학생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김밥을 먹고 음료수를 마시느라 바쁘기만 했다. 어린애들은 뛰어다니고 부모들은 온통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비가 그치기만 지루하게 기다리는 그들 앞에서 내가 나가서 놀라운 춤 솜씨를 보여 준다며 모여 앉은 사람들은 얼마나 놀랄까? 겉보기에는 점잖게 보이는 데다 나이도 적지 않은 중년 여인이 보여 줄 충동적인 행동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생각하니 쿡쿡 웃음이 나왔다. 혼자 마음 속으로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떨어지는 빗방울과 멋진 춤을 한바탕 추고 나니 신명이 절로 났다.

한참을 지나 나만의 무대는 무르익었다. 그때 소나기가 그치려는지 저쪽 하늘에서부터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했다. 선명한 하늘색은 밝으면서도 높게 보였다. 조금씩 그칠 듯 이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비의 향연을 그대로 보내기에 아쉬움을 느꼈다.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은 우리 부부만 남겨놓고 다른 사람들은 저만치 가고 넓은 능 안에는 다른 이들은 없었다.

인적 없는 숲의 고요함은 소나기가 남긴 것이었다. 다시 밝아지는 사위에 늦여름을 아쉬워하며 푸름의 정점에 오른 나무들과 인사를 한다. 그들이 말갛게 씻은 얼굴로 내뿜는 피스타치오가 주는 신선한 공기의 향연이 답으로 전해 왔다.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방울과 어울려지는 풍광은 진한 입맞춤 후 혀 끝에 남는 한 방울처럼 달콤함으로 온몸을 맴돌았다.

나뭇잎 끝으로 모여 떨어지는 방울 방울을 드문드문 맞아가며 능을 돌아 출입문께로 나오려고 할 때였다. 여름이 남겨준 소나기의 향연을 마저 음미하려 애를 쓰건만 오른쪽 하늘에 구름 사이로 갈라지듯 조금 벌어진 틈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지면에서 하늘까지 이어진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것을 분명히 드러나게 하는 늦여름의 강렬한 햇살은 몽환적 분위기를 재빨리 걷어가고 있었다.

차에 오르니 아스팔트에 젖은 자국만 남긴 채 햇살은 다시 뜨거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소나기는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을 뿐이다. 그러나 나의 살결은 자신이 느낀 첫 가을의 서늘함을 더욱 기억하려 할 것이다. 그토록 무서웠던 무더위는 그렇게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계절의 끝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있었다. 곧 떨어질 듯 떨어질 듯 망설임을 가득 담았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그렇게 이 여름은 한여름 낮의 꿈과 그 꿈에서 깨어나기를 거부하며 끝나려 한다.

 

 

이미연

<계간 수필>로 천료(99년). 그레이스 수필문우회 회원.

저서 공저 『단감찾기』, 『창으로 바라보는 풍경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