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처시하嚴妻侍下

                                                                                                정진권

 이 글의 주인공인 김선생은 작년에 정년으로 학교를 물러난 분이다. 현재 마나님을 모시고 큰아드님네와 함께 산다. 참고로 등장인물 하나를 더 소개해 두겠다. 초등학교 2학년짜리 큰손자다. 김선생 내외분은 이녀석을 큰놈이라고 부른다. 큰놈은 어린것이 매운 배추김치를 잘 먹는다. 나는 이제 이 김선생의 근황을 그 가정과 한 시장市場을 배경으로 해서 잠시 말해 보려고 한다.

 

김선생 댁에서 승용차로 한 15분 거리에 큰 시장이 하나 있다. 과일이나 채소는 물론 육류와 생선 같은 것도 늘 풍성하고 신선하다. 값도 여느 시장보다 싸다.

김선생은 한 주일에 한 번 꼴로 이 시장엘 간다. 물론 마나님과 함께 간다. 그러나 함께 간다고 해서 장보기에 있어서 두 분의 권리와 의무가 동등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시고 산다는 말을 다시 상기해 주기 바란다.

김선생은 언제든 마나님이 갑시다 하면 차를 몰아야 한다. 마나님이 물건을 고르면 그걸 카트에 싣고 뒤따라야 한다. 마나님이 계산을 마치면 그 산 물건들을 하나하나 챙겨 차에 싣고 또 운전을 해야 한다. 김선생에게는 다만 이런 의무만 있고, 달걀 한 개 마음대로 고를 권리가 없다. 굳이 있다면 소주 한두 병 집어 담는 것인데, 이 하찮은 권리마저도 마나님의 대단히 못마땅해 하는 시선 속에 행사하는 것이어서 권리를 행사하는 기쁨 같은 것은 아예 없다.

그러나 김선생은 불평 한 마디 없다. 불평을 하면 마나님으로부터 어떤 반격이 있으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뭘 행사하는 기쁨? 그 막중한 권리, 어서 도로 가져가세요.”

이 시장에서 마나님이 잘 사는 품목 중의 하나가 커피다. 마나님은 커피를 좋아한다. 마나님뿐만 아니라 며느님도 대단히 좋아한다. 그러므로 김선생 댁에 커피가 떨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다.

“어멈아, 물 얹어 놓았니?”

“네, 어머님.”

참 잘도 맞는다. 마나님과 며느님이 커피 잔을 앞에 놓고 부엌 식탁에 마주 앉으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까르르 웃음소리까지 섞여 끝이 없다. 마루에 낭군이 계시는지, 시아버님께서 계시는지, 마나님도 며느님도 다 오부지언吾不知焉이다.

“커피가 저리 좋은가, 원.”

김선생은 커피 맛을 모른다. 그렇다고 달리 좋아하는 차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다 다방엘 가 자릿값으로 커피를 주문할 때가 있다. 물론 제일 싼 것이다. 그러면서 이거 한 잔이면 소주가 병 반인데 한다. 이러니 마나님이 커피 사는 게 좋아 보일 리 없다.

그러나 김선생은 모른 체한다. 언젠가 그 쓴 커피는 왜 사느냐고 말한 일이 있다. 그때 마나님이 뭐라고 했겠는지 상상해 보시라.

“소주는 달고 답디까?”

이 시장에 큰 김치 가게가 하나 있다. 김치는 늘 담가 먹는 마나님이 그저께는 한 포기 사야겠다고 했다. 너무 먹음직스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큰놈이 얼마나 잘 먹을까?”

김선생이 별 자신도 없는 소리로 말했다.

“김치도 사다 먹나?”

마나님이 질 리 없다.

“여자들은 좀 편하면 안 돼요? 김치 담그는 것 쉬운 일 아녜요. 배추 다듬어 씻어야지, 소금 풀어 절여야지…….”

“알았어요, 알았어. 어떤 사람이 김치, 된장 사다 먹는 집에서는 며느리 안 본다고 해서 한 번 해 본 소리여.”

“그런 집에 딸 줄 사람은 어디 있답디까?”

저녁 식탁에서였다. 마나님이 큰놈을 보고, 너 먹으라고 이 맛있는 김치 사 왔다며 생색을 냈다. 그런데 큰놈은 한 조각 먹어 보고는 더는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마나님이 물었다.

“왜 안 먹니? 이게 얼마나 비싼 건 줄 아니?”

큰놈이 말했다.

“맛이 없어. 난 할머니가 담근 김치가 맛있어.”

어제 저녁때 김선생이 밖엘 나갔다 돌아와 보니 마나님이 부엌에서 며느님과 함께 절인 배추에 속을 넣고 있었다.

“김치 담그는 것 쉬운 일이 아니라더니, 웬일로 손길이 저리 가벼울까?”

김선생이 한 마디 하자, 마나님이 즉각 받아쳤다.

“당신도 당신 마누라 감동 좀 시켜 보세요.”

 

마나님을 모시고 사는 내 친애하는 김선생, 나는 이제 이 김선생에 대한 내 감상을 몇 마디 덧붙이고 이 글을 마칠까 한다.

김선생이 장보기에 있어서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 것은 엄처시하로서 현명한 일이다. 이게 싼가, 저게 싼가, 이런 심각한 고민을 김선생이 무슨 수로 감당하겠는가?

마나님이 커피 사는 것을 모른 체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다. 덕분에 비록 따가운 시선 속에서나마 소주 한 잔 할 수 있으니 좋고, 또 무엄하기는 하지만 부엌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야단치고 토라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러나 김치, 된장 사다 먹는 집 운운한 것은 참으로 우매한 짓이었다. 김선생은 물론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어떻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바로잡아지는데 왜 쓸데없이 말을 꺼내서 감당도 못할 반격을 받는가?

내 생각에는 김선생이 아직 철이 좀 덜든 듯하다. 세상의 많은 김선생 여러분, 여러분의 근황은 어떠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