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장수 아주머니

                                                                                                             김명

 이십 여 년 만에 가는 고향 길이었다.

버스에 오르자 늙수그레한 할멈이 창쪽 내 좌석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나는 차마 그 자리가 내 자리란 말이 나오지 않아 그냥 가방을 좌석 아래에 내려놓았다. 버스만 타면 멀미를 해서 간단한 드링크라도 한 병 마셔야 할 것 같아 다시 내려와 홍삼정 두 병을 샀다. 낯선 사람 앞에서 그것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 앞에선 왠지 조심스러워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무례하게 내 자리를 아무런 양해도 없이 차지했을 망정 혼자 마시기엔 왠지 쑥스러웠다.

자리에 앉자 홍삼정 한 병을 노인에게 권하고 나도 마셨다. 한편, ‘버스에선 종종 마실 걸 권하고는 남의 물건이나 돈을 훔치는 모리배가 있다는데, 혹시 이 노인이 이걸 거절하면 계면쩍어 어쩌나’ 하고 우려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버스는 아직 자리가 빈 채로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이삼 년 전만해도 원주에서 광주까지는 직접 가는 고속버스 노선이 없어 자기 차를 이용하지 않으면 서울로 가서 다시 광주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만 했었다. 이젠 직접 광주 가는 노선이 생겨 고향 가는 길이 쉬워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나는 가방을 열고 아직 읽다만 수필 책을 꺼내 읽었다. 노인은 창에 한쪽 팔을 베개삼아 기대어 잠이 들었다. 나는 모처럼 차에서 책을 읽고, 졸리면 눈감고 잠을 청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작은 설레임을 느꼈다. 책을 읽다 간간이 눈을 들어 창 밖을 보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차는 낯익은 영동고속도로를 벗어나 중부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노인은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여름내 농사일로 깊은 잠 한 번 못 잤는지 차 안에서 모처럼의 휴식을 취하는 것 같았다. 약간의 멀미 기운이 느껴진 나도 자리를 약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눈은 피곤하여 내려 감았지만 머리 속만은 더욱 맑아지는 게 혼자 떠나는 여행에 대한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수십 분 동안 내 머리 속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변해 버렸을 시가지들에 대한 막연한 상상들로 더욱 분주하기만 했다. 한참을 그렇게 신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잠시 후 옆자리의 노인이 잠이 깬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 든 어른 앞이라 나는 얼른 자리를 바로 세우고 눈을 떴다. 그리곤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그때 노인은 발 앞에 세워둔 가방에서 삶은 강냉이와 포도 한 송이를 꺼내 팔걸이에 올려 놓는 것이었다.

“매눌애는 내가 어딜 가기만 하면 이렇게 먹을 걸 챙겨 싸 준다우. 몸이 약해 일은 잘 못해도 마음 씀씀이가 착해서 참 고맙지 뭐유.”

하며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게 잘 여문 찰옥수수를 내 손에 들려주었다. 포도도 집에 있는 포도나무에서 딴 건데 시지 않고 맛이 괜찮다며 “깨끗이 씻었으니 잡숴 보셔” 하는 것이다.

홍삼정 한 병에 대한 답례치고는 너무 과했다.

 

노인은 영광에서 굴비 장사를 하는 딸네 집에 추석 대목 장사일을 거들러 가는 길이라며 나에게 행선지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순박한 듯 어리숙해 보이는 노인의 외모와는 달리 그의 얘기 속엔 강한 자신감과 함께 범접하기 어려운 나름대로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바깥양반이 뭐 하시나요?”

하며 묻던 노인은 사업한다는 나의 대답에,

“요즘 사업하기 힘들죠. 요즘은 장사해서 돈벌기는 힘들 때요. 내가 처녀 적부터 장사를 해봐서 그 속으론 요량을 훤히 알죠. 집이는 선생님인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안 하시나요? 집이 명륜동이요? 지금은 몰라도 옛날엔 그곳이 아주 빈촌이었죠. 우리가 여기 원주 처음 와서 살던 곳이 명륜동이었오. 지금은 아파트도 많이 들어서고 해서 많이 발전했지만, 내가 처음 여기 올 때만 해도 촌동네에 없이 사는 사람들만 모여 살던 데였오.”

하며 말꼬를 튼 노인은 당신의 인생 역정을 담아 토해내기 시작했다.

 

고향이 전라도 순천인 노인은 은행에 다니던 남편을 따라 원주로 오게 되었다 했다. 친정집 상포 장사 일을 돌보던 자신을 눈여겨보곤 남편은 조금만 거들면 틀림없이 장사로 성공하겠다며, 일자 무식인 자신을 글도 많이 배운 남편이 친정 아버지에게 사정사정 장가들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두 살이나 한 살 터울로 낳은 육남매와 삼십 초반의 과부로 노인을 남겨 놓고 저세상 사람이 되었단다.

남편이 떠난 후 노인은 아직 어린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걱정으로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숯장사였다. 객지에서 그것도 젊은 여자의 몸으로 시작한 숯장사는 그야말로 노인의 말대로 소설을 쓸 정도였다.

남자들 틈에 끼여 패거리에 넣어 주지 않아 따돌림받기가 일쑤였고, 타관 사람이라는 이유로 팔아 주지 않아 속상할 때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하루 세 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었다. 오직 육남매와 함께 입에 풀칠을 해야 하는 싸움에서 물러설 수가 없었다. 리어카를 끌고 하루에 수십 리를 걷고 또 걸었다. 어두워 집에 오면 아이들 밥 준비를 해놓고 새우잠을 한잠 자고는 또 어스름 새벽부터 일어나 숯을 받아서 시골길을 누볐다. 그러나 그땐 피곤한 줄도 몰랐다.

노인은 그렇게 모은 돈을 지금의 밝음 신협이 처음 창업할 때부터 저축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십 여 년 동안의 우량 고객으로 그곳 직원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감사패까지 받았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숯장사로 육남매를 큰 공부는 못시켰지만, 모두 잘 키워 시집, 장가 보내고 다들 밥먹고 사는 데 걱정 없이 만들었다며, 전라도와 강원도 사투리가 섞인 억양으로 자랑스레 얘기하는 노인의 모습은 사뭇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내 이름 석 자도 못 쓰지만 한 번 들은 이름과 전화번호는 절대 잊어버리는 법이 없다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간판 이름을 누가 적어 주면 절대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고 지나가는 어린 학생들에게 물어서 찾아갔지요. 혹시 무식한 것이 탄로나서 손해를 보면 안 되니께요. 애들 아버지도 살아 계실 때 나한티 글씨를 가르칠래다 포기했다니께요. 무슨 놈의 머리가 숫자 기억은 잘하는데 그놈의 글씨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분간이 안 되니 희얀하죠?

지금은 큰아들이 내가 하던 숯장사를 물려받아 하는데, 지금도 전화는 내가 다 받아 준다오. 아들은 차로 강원도 각지를 돌며 숯 배달하기만도 바쁘거든요. 남들은 더러운 숯장사를 왜 아들에게까지 시키냐는데, 아엠에프 때 조금 타격은 있었어도 그 장사만큼 괜찮은 기 없지요. 그래 아들이 지 스스로 댐벼들어 하잖아요. 그래 뵈도 그기 억대 장사라요.

나는 이제 뒤에서 사무실만 지켜주고 아들이 다해요. 난 다리 건너 봉산동에 사 층짜리 건물을 짓고 해서 세만 받아도 다 못쓰고 죽어요오. 그래도 내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정은 힘껏 도와 줘야 헐 것 같애요. 그래 지금도 내 몸을 뺄 수 없이 아들이 바쁜데 딸이 하도 와서 봐 달래니 매눌애가 걱정 말고 다녀오라지 뭐유. 매눌애 친정이 횡성인데, 사람들이 착해서 아무것도 안 보고 데려왔지유. 나는 즈이 아버지 죽고는 사는데 바빠 한 번도 영감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요즈음은 가야끔, 좀 오래 살았으면 아이들 사는 것도 보고 같이 이집 저집 다니고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쪼끔 든다우.”

노인의 얘기를 듣는 동안 버스는 어느덧 장성 고개를 넘고 있었다.

남편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지금 어디쯤 가지? 혹시 장성 고개 넘어가는 거 아니야?”

“어떻게 알았죠?”

“전라도 쪽으로 사냥갈 때 보면 지금쯤 장성 지나갈 시간이야. 도착해서 전화해.”

전화를 끊은 나는 괜스레 옆자리의 노인이 마음에 걸렸다.

버스는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었다. 노인은 다시 나에게 “부탁이 하나 있는디요” 했다.

“내가 영광을 갈라믄 광주 도착해서 다시 영광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디, 거기 가는 차표는 기계에서 뭘 눌르고 돈을 넣고 사야 하대요. 그란디 내가 까막눈이라 아직 혼자 차표를 못 사서 꼭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 하거든요. 그러니 광주에서 내리거든 영광 가는 차표 좀 하나만 사 주실라요? 딸네 집 갈 때는 이거이 젤 불편하당께요” 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대답했다. 광주 고속버스 터미널은 돔 형식의 지붕을 한 현대식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몰라 보게 변한 고향 모습에 놀라는 나에게 노인은,

“저게 벌써 오래 전에 다시 지은 거라우. 저기 동양에서 제일 큰 거랍디다.”

하며 친절하게 아는 만큼 설명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버스는 터미널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김 명

<수필문학>에 천료(9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