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하와이

                                                                                          이봉주

 가이드의 재촉에 겨우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관광버스에서 내렸다. 아직 잠이 덜 깬 아이들을 들쳐없고 소나기를 피해 우리가 황급히 들어선 곳은 진주만의 전쟁기념관이었다. 사람들로 흥청거리는 하와이의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전쟁기념관은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쟁이란 것이 다 그렇게 시작되지만, 설마 했던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새벽에 기습적으로 진주만을 침공했다. 일본의 폭격으로 미국은 진주만에 배치되어 있던 모든 전함과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들을 순식간에 잃었다. 겉으론 평화협정이라는 카드를 내밀고, 그 사이 전쟁을 준비한 일본에게 가만히 앉아 있다가 미국은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이다.

전쟁기념관 입구에 있는 커다란 돌에는 죽은 군인들에 대한 애도와 다시는 전쟁에 지지 않겠다는 분한 마음을 글로 표현하여 꼭꼭 쪼아 놓았다.

기념관 안은 밖보다 더 한가했다. 전시물도 사진 몇 장과 플라스틱으로 만든 모형 배 그리고 폭격으로 파괴된 비행기 파편들이 전부였다. 가이드는 별것 아닌 것들을 가지고도 일본과 미국의 싸움을 본 듯이 설명할 수 있는 달변이 자랑스러운 듯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문 밖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일본인 관광객들이 들어왔다. 우리 팀의 가이드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는구나 하고 무심히 생각하기엔 좀 비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본인 관광객들은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애리조나 호 앞에 서 있었다. 애리조나 호는 수십 대의 전투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규모로 당시 미국이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군함이었다. 또한 일본군이 퍼붓는 폭격을 받아 단 9분만에 1천 몇백 명의 미 해군을 끌어안고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배이기도 하다.

일본인 관광객들은 자기들의 조상이 격추시킨 그 배를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소오 데쓰까?”를 연발했다. 그들은 돌아올 연료도 없는 비행기를 타고 적진으로 날아가 적과 함께 자폭해 버린 가미카제 비행기의 파편 앞에서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였다.

나는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아니 기분이 나빠졌다기보다는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자신들의 혁혁한 성과를 보고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에 공연히 주눅이 들었다. 일본이 태평양을 건너 진주만까지 날아가 세계 정복을 꿈꿀 때 우리 나라는 세계 정복은커녕 그들의 식민지하에서 독립도 못한 채 겨우 목숨만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전범자라고 일축해 버리기엔 우리의 지난 모습이 너무도 초라했다.

또 다른 낯선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미국인 관광객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미국인들은 애리조나 호는 곁눈질로 지나치더니,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는 사진 앞에서 한참을 떠들었다. 일본의 항복 조인식이 이루어진 미주리 호 사진 아래에 써 있는 깨알 같은 글씨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누구 들으라는 듯이 소리 내어 읽었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인들도 어느 새 조용해졌다. 목소리가 작아진 일본인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나가는 것을 보며 내심 통쾌하게 생각했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아까보다 더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일제 36년 동안 우리의 선조들도 나라를 위해 독립군이 되어 수많은 목숨을 버렸다. 그러나 결국 독립은 미국의 핵폭탄에 의해 어부지리로 얻어졌다. 한일합방 때도 독립을 할 때도 우리 나라는 힘이 없어 주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미국과 일본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전쟁이라는 정당하지 않은 힘을 사용했지만, 그것도 힘이 있는 나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정당하다고 말하는 힘과 정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힘, 이도 저도 없는 나라의 백성들은 힘 있는 나라의 백성들 앞에서 자존심이 상하지만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전쟁기념관을 빠져 나오자,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해가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씁쓸한 기분 때문에 화사한 무지개를 봐도 마음이 심드렁했다. 내가 본 하와이에는 원주민보다 일본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일본인들은 와이키키 해변가의 거의 모든 상권을 장악했고, 하와이의 스카이 라인은 일본인이 만들고 있었다. 일본은 전쟁에선 졌지만 그들은 이미 고공 미사일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닌 돈으로 하와이를 정복했다.

요즘 언론 지상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일본이 자기 나라 국민들이 침략자라는 죄의식을 갖지 않게 하려고 역사를 왜곡하는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침략을 당한 나라는 또 우리 나라다. 우리 나라는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라에 힘이 없다. 백 년 전에는 무력에 맞설 힘이 없었고, 지금은 일본의 경제력에 맞설 힘이 없다. 지금도 그때처럼 분노한 국민들만 독립운동을 하듯 일본에 대항하고 있다.

앞으로 몇 년이 더 지나야 이 나라 백성들이 세계 속에서 어깨를 쭉 펴고 다닐 수 있을까.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이봉주

<계간 수필>로 등단(2000년).

현 이화여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