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년 뒤의 선물

                                                                                                          김명규

 남편의 새 직장을 따라 우리는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하게 되었다. 남의 집 비좁은 이층에 전세를 얻었기 때문에 묵은 살림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포마이커 장롱과 오래 된 찬장도 버리자고 나는 시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으나 못내 섭섭한 눈치였다. 찬장에서 그릇들을 꺼내어 어머니는 말없이 커다란 고무통에 차곡차곡 담았다. 쓰지 않는 유기 그릇들을 고물 장수에게 넘겨줄 모양으로, 어머니는 그것도 한쪽으로 치워놓았다. 가볍고 녹슬지 않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밀려난 놋그릇이었다.

이삿짐을 트럭에 싣던 날, 분홍 보자기에 따로 싸놓은 묵직한 그릇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무거운 돌냄비였다. 길에 버려도 누가 주워갈 것 같지 않은 새까맣고 심란스런 그릇이었다. 정갈하신 어머니가 저런 돌냄비를 왜 보자기에 싸 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우툴두툴 투박한 몸통에 귀가 달렸고, 석재는 쑥돌이 분명했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어머니가 그 돌그릇 안에 팥이나 참깨 같은 잡곡을 넣어두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잡곡을 담아 쓸 그릇이라면 예쁘고 가벼운 것이 얼마든지 많이 나오는 때였다.

남편에게 나는 무겁고 별로 쓸모도 없는 그것을 버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깜짝 놀랐다. 그건 아버지가 출장갔다 돌아오시던 날 어머니께 사다드린 선물이라는 거였다.

시아버님을 나는 흑백 사진으로만 뵈었을 뿐이어서 도무지 어떤 분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버님은 광주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하시고, 곧바로 공무원이 되어 세무서장을 지내신 분이라 하였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아버님의 전근을 따라 이곳저곳 당신의 삼남매를 데리고 관사에서만 생활하였다. 시댁 큰아버님은 벌이가 적어 아버님의 월급은 항상 절반을 떼어 큰집으로 보내 드렸다고 한다. 그런 아버님이 마흔다섯에 병환으로 세상을 뜨셨다. 유족들은 관사를 비워야 했고, 오두막 한 채도 없어 막상 머리 두르고 갈 곳이 없었다. 세무서장을 지내신 분이 그처럼 청빈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 동료들도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친분이 있는 고인의 동료들이 나서서 성금을 모아 집 한 칸과 얼마의 위로금이 지급되었다. 서른여덟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의 시린 마음을 나는 그 시절 한순간도 헤아리지 못하였다.

누나와 형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뒤였으므로, 막내며느리와 십삼  년을 함께 사시는 동안 어머니는 손자들을 돌보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가난한 집에 시집온 며느리가 가엾어서였을까. 집안 구석구석 힘든 일은 어머니 손이 먼저 갔다.

살림살이에 알뜰한 어머니에게 겨우 그 형편없이 초라한 돌냄비를 선물로 사 주셨다니. 하지만 어머니는 그 돌냄비를 한 번도 냄비의 쓸모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것을 처음 사 왔을 때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짓던 때였고, 그 후 연탄이 나와 아궁이를 개량했지만 그 냄비의 크기란 아궁이에 박혀 꺼내는 일이 도무지 힘들 터였다. 내가 시집왔을 당시에는 식구가 늘어 그 돌냄비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나는 시아버님이 원망스럽고 야속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 옛날 많은 여성들이 선호하였을 모나분이나 구리무 한 통쯤 선물로 사 왔더라면 어머니는 두고두고 고마워하셨을 텐데. 하지만 며느리인 내가 보이지 않을 때를 골라 어머니는 찬장에서 그 돌냄비를 꺼내어 깨끗이 삶은 행주로 닦고 또 닦아 왔으리라. 어쩌면 어머니는 남편이 남기고 간 단 하나의 유물인 돌냄비에서 아버님의 영혼을 만나고 말 없는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남편의 영혼을 간직하듯 분홍 보자기에 돌냄비를 싸들고 나서던 어머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뒤로도 우리는 두 차례나 이사하였다. 이사할 때마다 나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모시듯 그 투박한 돌냄비를 싸안고 다녔다. 아이들이 장성하여 모두 제 일을 찾아 객지에 나가 있고, 이제는 아파트에 우리 두 내외만 남게 되었다. 어쩌다 밥 두 그릇을 전기 밥솥에 안치는 일이 큰 접시에 콩알 하나 담아 내놓는 듯해서 문득 그 돌냄비 생각이 났다. 싱크대 깊이 처박아 둔 그것을 꺼내어 수세미로 여러 번 닦고 씻었다. 그리고 두 그릇의 밥을 안쳐보았다. 요즘 식당에서 흔히 보는 얄팍한 돌솥과는 달리 몸채가 두툼하여 쉽게 끓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번 끓기 시작하면 약한 불에서도 끓어 서서히 뜸이 들었다. 가스 불을 꺼놓은 후에도 두툼한 뚜껑 사이로 누룽지 눋는 고소한 냄새가 은은하였다. 뜨겁고 둔한 뚜껑 꼭지를 행주로 싸서 열면 밥알이 찬 공기와 부딪쳐 물기를 거두는 소리가 싸아 하고 들린다. 양은 솥의 숭늉을 먹던 때보다 더 숭늉 맛이 깊었다.

내가 돌냄비에 밥을 짓고 있을 때 퇴근하여 돌아오는 남편은 아이처럼 좋아한다. 밥알이 쫘악 퍼져서 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도는 밥을 남편과 오순도순 먹으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시아버님과 어머니가 못다 하신 내외의 정분을 남편과 내가 대신 나누는 것 같다. 돌처럼 차가운 듯하지만 한번 더워지면 쉬이 식지 않는 진지함에서 돌냄비를 볼 때마다 나는 냉철하고 엄격하신, 그렇지만 깊은 정을 지니신 아버님을 뵙는 듯하다. 돌냄비 하나를 선물로 남기신 아버님은 부부간의 사랑까지도 대물림하고 가신 분이셨다.

가난하지만 양심에 한 점 부끄럼없이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늘 말씀하셨다는 시아버님의 가르침을 내가 닦고 있는 돌냄비에서 새겨 듣는다.

 

 

 

김명규

<에세이 문학> 천료(2001년). <문예사조> 신인상 수필 당선.

수필집 『당신의 이름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