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다는 것

                                                                                                        金泰吉

 나이가 많다는 것은 요절夭折의 불행을 면했다는 뜻을 함축한다. 요절이 왜 불행이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꽃도 피기 전에 봉오리 상태에서 떨어졌다면 역시 아쉽고 슬픈 일이다.

요절이 불행이라면 장수長壽는 자동적으로 축복에 해당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젊어서 한때 올곧게 산다고 칭송받던 사람이 늙어가면서 추태를 보이는 예도 적지 않으니,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 사람은 30세를 넘기기 전에 죽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 괴테에 대하여 공감 비슷한 감동을 느낀 것은 내 나이 20대 초반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러나 나 자신이 30세 이전에 죽었으면 하고 바라지는 않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을 남긴 우리 나라 조상들은 산다는 것 자체를 축복이라고 느낀 낙천樂天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 후손들까지 거지의 노래 ‘장타령’을 부르면서도 덩실덩실 춤을 추지 않는가.

슈바이처가 역설했듯이 모든 생명이 경외敬畏롭고 귀중하다면, 산다는 것 자체가 축복임에 틀림이 없으며, 되도록 오래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힘을 얻는다. 그러나 하나의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하는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을 생각할 때, 장수 그 자체가 축복이라는 주장은 곧 논리의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다.

생명의 단순한 연장 그 자체보다도 삶의 과정에서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주장이 그래도 가슴을 적신다. 한 사람의 삶의 가치는 그가 몸담은 사회를 위하여 얼마나 이바지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말한 흔해 빠진 거리의 철학자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요즈음.

 

삶의 현장은 치열한 생존 경쟁의 수라장이다. 살 만치 산 늙은이들이 죽지 않고 남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이른바 ‘고령화 사회’를 오늘의 젊은이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지하철 열차 안에 마련된 ‘노약자 보호석’을 바라보는 늙은이의 마음은 은근히 착잡하다. 늙은이들은 자신들에게도 젊었던 날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까닭에 오늘이 서글프고, 젊은이들은 그들에게도 늙은 날이 곧 찾아온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는 까닭에 오늘이 즐겁다.

늙은 동창생들이 모이면 젊어서 화려했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그러나 그 한때뿐이고 헤어지면 다시 적막한 시간이 다가온다. 이미 지나간 옛날의 기억에 연연하기보다는 오늘과 내일을 위하여 뜻있는 삶은 구상하는 편이 슬기롭다. 슬기로운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뜻있는 삶의 좁은 길을 찾아낸다.

‘노오라 젊어서 노라아, 늙어어지이면은 못 노오나아니…….’

이 노래말에 담긴 인생관에 공감을 느꼈던지, 우리 조상들은 이 노래가락을 즐겨 불렀다. 그러나 놀이는 결코 젊은이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며, 슬기로운 사람들은 늙은 뒤에도 놀이의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늙어지면 못 논다’는 초조한 마음으로 놀이에 지나치게 열중하면, 놀이에 지쳐서 도리어 괴로움이 따른다. 놀이의 본질은 즐거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냄에 있으며, 즐기면서 하면 일 가운데도 놀이가 있다.

 

태백산에 오른 적이 있다. 늙은 주목朱木의 군락群落을 가리키며 안내자는 “살아서 천 년, 죽어서도 천 년”이라고 자랑하였다. 늙을수록 더욱 멋있어 보이는 것은 주목만이 아니다. 마을 어귀의 거대한 느티나무도 그렇고, 바닷가의 삭풍朔風을 이기고 살아 남은 노송도 그러하다. 현대 사회에도 거목巨木을 닮은 인물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이리 왜소矮小의 길에서 옥신각신하는가?

옛날 어느 절의 고승이 자신의 임종을 예연하였을 때, 많은 제자와 신도들이 머리맡에 모여 앉았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떠나는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 평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고종명考終命을 오복의 하나로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