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나무꾼

                                                                                              유혜자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고사故事를 생각할 때마다 얘기의 본질과 다른 엉뚱한 생각이 들곤 한다. 너무나 잘 알려진 고사이지만 되풀이해 보면 나무하러 산에 갔던 사나이가 신선들이 바둑 두는 것을 재미있게 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다. 그런데 자기 집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고 동네에도 아는 사람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며칠 동안의 일인 줄 알았던 것이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여서 동네에 사는 사람들과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그 나무꾼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서로 믿고 의지하며 응집된 힘으로 세상을 헤쳐나가던 가족도 없어지고 속내를 털어놓을 친지도 사라진 처지에 어떻게 여생을 마쳤는지 생각만 해도 쓸쓸해진다.

현대를 살면서도 이따금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명분도 없는 일로 며칠 동안 몰두하다가 마치고 나서 홀가분해진 날, 소원했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전화를 걸면 가족이 받아서 외출중이라거나 무인 응답기만 틀어놓은 빈 집이 많다. 사전에 언제쯤이면 바쁜 일이 끝난다고 예고하거나 약속한 처지도 아니면서 섭섭하고 고독감이 엄습해 온다.

어렸을 때 낮잠에서 깨었을 때 가족들이 다 외출하고 텅 빈 집에 혼자 남겨졌던 사실에 놀란 일이 있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도 안 되고 공허하고 무서웠던 그때와 상황은 다르면서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섬처럼 혼자일 때 가슴에 우주를 품으려는 시도도 못해 보고 외로움을 승화시킬 만한 어떤 철학도 갖추지 못한 처지이다.

이렇듯 대책 없는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떠올려보는 이름이 있다. 몸담았던 도시를 버리고 고적한 시골을 혼자서 찾아간 H.D. 소로, 그는 월든 호수가 있는 숲속에 손수 통나무집을 짓고 밭을 일궈 자급자족하는 거의 원시적인 생활을 2년 동안이나 했다. 고독 속에서 자연과 대화하고 날마다 새로운 감동으로 자연을 예찬하며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로 명저 『숲속의 생활』을 펴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책 속에서 ‘나는 고독처럼 다정한 친구를 이제껏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밝히고,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으려는 인간의 자주적인 면을 나타내려 했다.

기계처럼 반복되는 일상, 인정이 메마르고 책임만 강요되는 혼잡한 도시를 떠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간섭 없는 자연 속에서의 은밀한 삶은 모험이지만 신선할 것도 같다. 더욱이 소로처럼 빛나는 예지와 시심詩心에 차 있고, 2년 동안이라면 한번 시도해 볼 만하다.

그러나 어릴 적 홀로 집에 남겨져 있었을 때 이웃집 아주머니가 들렀다가 베풀어준 위로와 사랑을 생각하면 그 용기도 안 날 것 같다.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웃집 아이가 힘없는 기색이면 이마를 짚어주고 열이 있는가 살피고 돌봐주었다. 그뿐인가. “참 복스럽게 생겼구나. 크게 되거라”, “총기 있게 생겼구나. 석학 되겠구나” 등 덕담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런 이웃이나 살펴주던 집안의 윗대 어른들이 돌아가고 나니 힘이 빠진다. 사실 어른이 사라지고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자연의 이치지만 잊을 때가 많다. 그런 사랑을 받기보다 베풀어야 할 처지가 된 것에 당황한다.

그러나 내게도 위안이 되고 긍지를 가질 일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직장생활을 긍지와 보람을 느끼며 해낸 것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동안 길을 잃고 헤매며 무신론자처럼 지냈던 날들이 부끄럽지만 나는 모태 신앙인이다. 슬픔과 좌절 속에서만 빛이 있는 존재, 절대자에게 의지하게 되는 나약함도 절감하고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이고 염치없는가 반성도 해본다.

직장에서도 젊었을 때는 어려운 일을 남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해내는 것이 능력을 나타내는 떳떳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어려움을 드러내지 않고 쩔쩔매며 하다 보니 결과가 안 좋을 때가 많았다. 어느 날인가 피치 못할 일이 생겨 송구함을 무릅쓰고 선배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의외로 선선히 도와주며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던 기억이 난다.

사람과 사람의 경우도 이런데 절대자라면 뒤늦게라도 의지하려는 지각믿음을 가진 자에게 관대하지 않을까. 성경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에게 병 고침을 받고 싶어한 혈루증 앓는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만인에게 둘러싸인 예수 앞에 떳떳하게 나서지도 못하고 겨우 뒤에서 옷자락에만 손을 댔다. 그런데도 그 여인의 병을 고쳐주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기뻐한 예수가 아닌가.

소로도 월든 숲속에서 손수 나무를 해서 땠던 나무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쓸쓸함에 약해지지 않았다. 산 속에 갔다가 신선놀음에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내려온 나무꾼처럼 쓸쓸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남보다 먼저 믿은 모태신앙이면서도 자의식의 무게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지만, 이제는 산 속에 갔다온 나무꾼처럼 쓸쓸할 때 그 옷자락이라도 스치는 여호와 경외자의 몫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