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속의 50년

                                                                                                     윤모촌

 첫사랑이 잊히지 않는다고 하듯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딛던 시절 ― 그것도 해방 전후의 격동 속과, 처절했던 동족 상잔의 전쟁을 전후해서 지내던 면면面面들을 잊지 못하던 터에, 실로 50여 년 만에 심 선생을 만났다. 문장에서 선생을 붙여 말하는 것은 존칭이 되는 것인데, 내가 심 선생이라 함은 그와 시골 조그마한 학교 교무실에서 쓰던 일반적인 호칭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해방 5개월 전, 그가 22세이고 내가 23세였다. 두 사람은 꿈에 부푼 나이였지만, 암울했던 해방 전후기와 일진광풍一陣狂風 같았던 좌우 이념 바람 속에서 6·25를 맞았다. 그 후로 흩어져 50여 년이 흐르고, 나는 지금 그와 80줄에서 지난날의 회포를 푸는 자리가 되었다. 심 선생과 통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흥분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아픔과 젊은날의 추억이 머리 속을 어지럽게 하면서, 이 민족이 다 겪었던 일 ― 피비린내나는 와중에 휘말렸던 기억들…….

10시 반, 현관문을 들어서는 노인에게 나는 우선 심 선생이 아니냐고 확인하듯이 물었다. 약속한 시간에 나타난 그는, 그 옛날 검은 머릿결에 윤기가 흐르고 팽팽한 얼굴과 건강한 치아의 심 선생이 아닌 까닭이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틀니를 한 입 모습이 변해 있어서 한참을 뜯어보아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나는 진정을 하면서 심 선생의 손을 잡고, 죽지 않으면 만나는구려 하였다. 길에서 만나면 열 번을 스쳐도 알아볼 길이 없겠다 했더니, 그도 내게 같은 말을 하였다.

숨을 고르고 나서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와 함께 지내던 1945년에서 48년 사이 미군정美軍政 하에서, 바른말 한다는 죄로 재판도 없이 구금당했다가 전근이 된 이후의 내 이야기로 시작하였다. 그 시절 나는 고향이 졸지에 38선으로 막혀, 지역 출신 동료와 각별한 이웃이 되어 실향의 외로움을 달래며 지냈다. 우선 이들이 궁금했고, 심 선생은 그들이 부역附逆을 했다 하였다. 그리고 북으로 갔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고, 집터는 잡초가 우거진 채 폐허가 돼 있다고 하였다. 나는 몸서리나는 비극을 다시 되새기며, 그들의 운명이 허탈하고 안타깝고 슬펐다. 북으로 갔다 해도, 나는 그들이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살 사람들이 아닌 줄로 안다.

갈피조차 가려잡을 수 없는 얘기를 나는 또 물었다. 부유한 지역 유지의 자제로 서울대에 갓 입학했던 학생의 집안이 궁금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면장을 지냈고, 6·25가 나자 학생은 좌익 진영의 선봉에 섰다. 소위 저들이 말하는 숙청 대상의 1호격이었으나 아들로 인해 위기를 넘겼다. 그랬으나 그들의 운명을 누가 알 일이던가. 9·28 수복이 되면서 박산이 났고 삼촌까지 무참하게 당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기억하기조차 힘든 비극들을 또다시 되새겼다.

심 선생과 아픈 얘기를 꽤 했지만, 계속 얘기를 나누면서 한숨을 짓기도 하고 침을 삼키기도 하였다. 나는 그의 얘기 끝을 잡아, 국민방위군으로 서울에서 마산까지 걸어 내려간 얘기며, 목숨이 길어 살아 있다고 했더니, 그도 그랬다면서 고생한 얘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그가 교장으로 승진해서 정년 후를 편하게 지내겠거니 했으나 그도 바른말 하는 쪽으로 주목을 받았고, 남침하南侵下에서 내키지 않는 학교에 잠시 나갔다가 이내 물러선 죄로 체포령이 내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그후 신앙생활로 오늘에 와선 교회 장로에 이르고 있다 등으로 소설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복직을 하려 했으나 심기일전 벼농사를 1만 평 넘게 손수 지었고, 교회를 건립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의 손은 힘차게 거칠어져 있었고, 기관지가 좋지 않아 계속 기침을 하였다. 복직을 했다면 많은 죄를 범했을 것이라면서 성서를 줄줄이 외워댔다. 가톨릭에 입교하고서도 성서 한 구절을 외지 못하는 나와 비교가 되면서, 나는 그의 변모가 놀라울 뿐이었다.

숨이 찬 그를 좀 쉬게 해야겠기에, 나는 그의 말을 중간에 끊어 같은 동료 H 씨의 얘기를 꺼냈다. 그의 부인 L 여교사의 얘기가 궁금했던 것인데, 그때의 우리는 모두 푸른 꿈에 부푼 젊음이었다. L 여교사는 앞서 말한 학생의 고모로서, 같은 교무실에서 H 씨와 연애를 하였다. 그 H 씨가 대학에 진학을 하면서, 당국의 시책인 국대안國大案(국립종합대학안)의 반대 대열에 끼었고, 좌익 이념에 물이 들어갔다. 이윽고 검거 선풍에 휘말려 보도연맹(좌익인의 전향을 위한 단체) 회원으로 묶이고, 6·25가 나면서 소식이 묘연했다. 아마도 희생이 됐을 것이라는 것이 후일담인데, 나는 그가 처가와 함께 피바람에 휘말린 운명이 너무도 기구해서 애처롭기가 짝이 없다.

서울에서 내려온 H 씨는 나와 한 이불을 덮고 하숙을 했던 만큼 우정으로 지내던 사이이다. 그의 아버지는 중추원 참의를 지낸 당대의 세도가였고, 형도 친일 행적을 혁혁히 남긴 명사였다. 그런 그가 해방이 되면서 기득권 지배층 세력 편에 서지 않고, 부유한 처가와 더불어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나는 이 민족의 이같은 운명을 무엇이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말을 한다면 인간사의 희롱이라 할밖에 없지만, 희롱이라 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가혹한 것이 아닐 수가 없다.

화제는 심 선생의 이야기로 다시 이어지면서, 나는 그때에 이미 결혼한 그가 내외궁이 좋지 않아 고민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의 교무실에는 앞서 말한 H 씨가 L 여교사와 연애를 했고, 나는 옆자리의 B 씨와 연애 중이었다. 그런 분위기여서 심 선생의 심사는 편안치가 않았을 것으로 안다. 심 선생은 재혼을 해서 6남매를 두었다면서 조금 전 내 집엘 오면서, 내가 그때의 B 씨와 살겠거니 했다 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집사람이, 재미있는 얘기를 한다며 말했지만, 나는 심 선생에게 지금도 B 와의 일이 잊히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얘기의 줄기를 다시 돌려, 상잔의 아픔을 또 더듬었다. 생각하기조차 두려운 비정한 일들 ― 어제의 우정이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어지면서, 물 따라 산 따라 원한과 보복으로 얼룩졌던 세월들……. 우리는 중간 중간 한숨을 짓기도 하고 허탈한 웃음을 흘리기도 하면서, 얘기의 끈을 놓지 않았다. 4시가 넘어서야 화제의 줄기를 새로 잡아 그는 70을 넘어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하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것을 하늘의 뜻이라고 말하며, 젊었을 때의 객기가 뉘우쳐진다고 하여 나도 동감하였다.

심 선생이 자리를 일어설 때 시계는 4시 반, 그러고 보니 5시간 동안에 50년의 세월을 누빈 셈이다. 그런데도 무엇인지 모르게 아쉬운 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치유될 수 없는 우리의 상처 ― 흘러간 젊은날을 다시 앓게 하는 것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닌지. 나는 아파트 현관까지 내려가, 80 노구에 승용차를 손수 몰고가는 심 선생에게 손을 흔들어 전송하였다. 낙조落照가 드리운 서로의 뒷모습에 지난날이 겹치면서, 아픈 세월자락의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날의 감상感傷에 젖어, 심 선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20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