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행복감

                                                                                                     유경환

 1. 내 속의 나

 

바람결이 없는데도 나비처럼 흔들렸다. 여며진 저고리 앞가슴이 나풀나풀 벌어졌다. 목을 타고 흘러내린 동정이 단정히 마감되고 접힌 옷고름 밑에선 저고리 앞 깃이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렸다. 장난감 도끼 날 모양으로, 아니 나비 날개처럼 가볍게 나풀대는 앞 깃은 안에서 새어나오는 숨결에 따라 일정한 박자의 율동을 지었다.

저고리는 언제나 흰색, 눈부시게 하얀 옥양목. 앞가슴의 율동은 같은 박자로 치마 주름도 흔들었다. 치마는 검은색, 검은 윤기가 흘렀다. 내 담임선생님은 언제나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었기에 조회 때 교단 양쪽으로 늘어선 선생님들 가운데서 늘 첫눈에 띄었다.

조회가 시작될 즈음, 선생님은 내 앞에 바짝 다가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만 들어 줄을 똑바로 세웠다. 맨 앞이 언제나 내 자리. 키가 작아서 그랬다.

이마에 닿는 저고리 앞 깃이 어떤 땐엔 코 끝을 살짝 스치기도 했다. 그렇게 살짝 벌어질 때 아주 조금 내비치는 가슴의 볼록한 흔들림이 내 마음을 간질렀다. 앞 깃이 닫히면 그 흔들림이 치마 주름을 타고 파도처럼 퍼졌다. 우리 반 긴 세로 줄이 똑바로 정리될 동안 선생님에게서 어떤 향기가 날까 하고 코를 벌름거렸다.

향기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더운 숨결이 배어나오는 율동감에 내 손이 오를 뻔, 오를 뻔하였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조회 시간마다 속으로 가슴이 콩닥거리는 것에 놀랐으며,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숨을 길게 들이쉬고 내쉬곤 하였다.

이 내숭스러운 비밀은 육십 중반을 넘긴 나이에도 청보석이듯 내 속에서 빛나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담임선생님 숨결에 그토록 민감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사범학교를 마치고 우리 학교에 부임한 나이였으니 한 15년쯤 위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렇게 좋았다.

어디엔가 살아 계시다면 팔순을 넘기셨으리라. 천연색 사진이 없던 시절이지만, 내 눈에 찍힌 발그라니 고운 뺨살과 통통한 손등이 바래지 않은 컬러 사진으로 남아 있다. 가슴 두근거리는 회상으로 유년 시절을 돌아보면 아직도 부끄러운 미소를 되살려 낼 수 있다.

올해 학교에 들어간 손자를 보면서, 나와 똑같은 감정을 여 선생에게 품을 수 있으리라 여긴다. 손자의 작은 눈동자에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비치리라 믿는다. 그래서 실제 나이보다 더 먹은 나이로 손자를 바라보곤 한다.

“얘야, 네 담임선생님은 여 선생님이시냐?”

한 번쯤 물어보고야 말 테다.

 

 

2. 거짓말 연습

 

전철 계단에서 쬐그만 장난감을 보았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본 사람이 있다. 학생들이다. 그 가운데 한 학생이 줍지 않고 발로 찼다. 그래, 내 앞에 떨어졌다. 나는 주워 들었다. 흰색 헝겊의 곰. 빨간 허리띠와 검은 코를 가졌다. 여학생들이 메는 가방에 달고 다니는 마스코트이다.

계단을 오를 때 가방 지퍼에 매달려 달랑대다가 붐비는 인파에 끌려 떨어진 모양이다. 계단 끝에 올려놓고 오다가 생각해 보니 또 누군가의 발길에 채이면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 같았다. 잃어버린 여학생이 어디쯤에서 잃었는지를 알아야 찾으러 올 것이며, 설사 짐작이 가도 장난감을 위해 되짚어 올 것 같지 않았다.

짐짓 내 주머니에 넣고 왔다.

집에 오자마자 세제로 씻고 더운 물로 씻고 또 씻었다. 말갛게 제 색을 내는 곰을 내 방문에 매달았다. 하룻밤만 지내면 마를 것이다. 말라도 그냥 둘 것이다. 손녀가 와서 “할아버지 저게 뭐야?” 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러면 거짓말을 할 것이다. “널 주려고 구해 왔지… 어때? 네 가방에 매달아 보련?”

요즘 이런 대화를 연습해 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거짓말을 연습하면서도 행복하다. 나의 행복이고 작은 곰의 행복이며 또 손녀의 행복일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행복하다.

 

 

3. 환상귀향

 

귀향이라는 제목으로 씌인 수필은 한두 편이 아니다. 한결같이 편안한 안식을 준다. 삶에 피로를 느끼면 이런 글에 끌리나 보다. 요즘 글에는 연어 이야기가 들어가거나 귀소본능이라는 낱말이 곁들여진다. 그러나 수필 작품 바탕에 가라앉아 있는 감정은 그리움이요 이는 정서의 문제다.

나른해진 육신을 끌고 고향엘 찾아가 따분하게 여겼던 세월의 자국을 오히려 즐겁게 기웃거린다. 회상의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한 소절씩의 동요를 부르듯, 과거를 마디 마디 음미해 본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며 타인 보듯 그 뒷모습을 연민한다.

소박하게, 초라하지 않게 자신을 회상하는 작품 가운데서 셔우드 앤더슨(Sherwood Anderson)이 쓴 『홈 커밍』은 언제나 첫번째 자리에서 나의 회고를 기다린다. 그러나 내겐 돌아가 볼 곳이 없다. 실향민이다. 50년이 더 흘렀다. 강으로 치면 물줄기가 여러 번 바뀌었을 흐름이다.

환상으로 귀향하여 희미하고 아득해진 풍경을 제자리에 복원하려고 애써 본다. 이렇게 하여 익숙해진 풍경은 첫째 면사무소가 있는 거리에 빨간 우체통, 두 번째 나무 울타리 둘려진 골목길, 세 번째 한없이 넓어 보이던 운동장, 네 번째 운동장 끝에 눈짓처럼 반짝이던 사금파리의 기억이다.

이런 기억의 조각들을 조각보로 이어 맞춰보나 그것들이 어째서 그리움의 바탕이 되는지는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이런 회상이 그냥 따뜻하고 친근하며 좋은 그림으로 다가올 뿐이다. 마침내 기와 지붕을 얹은 돌담집이 보인다. 엮은 수숫대에 말라붙은 진흙 틈새로 벽의 안팎이 들여다보인다. 이 벽을 따라가면 한 끝에 기대 있는 아주 오래된 삽 한 자루가 보인다.

할아버지가 쓰셨고 아버지도 들었던 삽 한 자루. 언젠가 나의 관에 흙 한 줌 덮어줄 때를 기다리며 햇볕 쬐고 있는 모습. 이런 조용한 풍경이 확대되면서 다가오는 것이 요즘 환상귀향의 끝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