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수성못

                                                                                                  허창옥

 나는 자주 수성못을 찾는다. 어디론가 나가고 싶지만 멀리 갈 수 없을 형편일 때 그저 만만하게 찾는 곳이 수성못이다.

오후 한때, 아니면 저물녘이라도 생각만 있으면 금방 달려올 수 있어서 좋다. 누군가를 만날 때도 되도록 못 주변의 찻집이나 레스토랑을 그 장소로 제안하는데 대개 좋다고들 한다. 어느 계절이든 호수의 정취는 그만이니까.

왕벚나무, 배롱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전나무, 히말라야시더, 그 나무들 사이에 놓여 있는 벤치들, 그리고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다. 한결 같은 표정을 지닌 못 물에는 언제나 오리들이 유유자적 떠다닌다. 한나절 둑을 거닐거나 서 있다 보면 아주 유정한 마음이 된다. 어느 때는 평화가, 어느 날은 슬픔이, 또 다른 날은 그리움이 가슴에 가득 차는 것이다. 그런 정감들의 정체가 무엇이든 나는 조용한 사유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것으로 그 하루는 풍요롭다. 그래서 나는 종종 수성못이 그립다.

수면의 반쯤은 얼어붙어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못의 북동쪽은 빙판이고 남서쪽의 수면에는 자잘한 물결이 보인다. 나는 지금 못의 서쪽 둑에 서 있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난 시각, 해는 남서쪽에 와 있다. 차가운 날씨지만 햇살은 맑디 맑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대개 나처럼 남쪽이나 서쪽에 모여 있는 것 같다.

 

풍경 하나

중년의 남자 세 명이 자전거를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벌써 몇 바퀴 째 못을 돌고 있다. 운동이다. 수성못에는 언제나 운동하는 사람이 있어서 좋다. 부부가 함께 간편한 차림으로 나와서 걷거나 뛰거나 하는 모습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걷기도 힘들 만큼 뚱뚱한 외국인 남자가 티셔츠가 흠뻑 젖도록 달리고 있었다. 운동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부럽다. 내가 가장 못하고 또 하기 싫은 것이 운동이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옆을 지날 때 내는 ‘쉭쉭’ 하는 소리가 좋다. 그 건강한 힘이 전해져 오는 것 같다.

 

풍경 둘

몇 발짝 옆에 한 쌍의 남녀가 있다. 못의 동쪽에서 내가 이곳으로 왔을 때부터 그들은 같은 모습이다. 말을 주고받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한 사람쯤 들어설 만한 폭을 두고 떨어져 서서 못 물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분위기가 예사롭지가 않다. 이별이라도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동쪽 둑으로 가 보시라. 동쪽 둑 뒤에는 나무들이 둘러 서 있고 못 물에 안겨 있는 작은 동산도 가깝게 보인다. 남쪽에는 놀이배들의 선착장이 있어서 조금 산만하고, 서쪽과 북쪽에는 나무가 없어서 운치가 덜하다. 이별의 장소로는 아무래도 동쪽이 제격일 것 같지 않은가.

 

풍경 셋

젊은 부부가 지나가는 청년에게 사진기를 맡기고 자세를 잡는다. 너더댓 살쯤 된 딸애를 앞에 세우고 남자는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두 사람은 아이의 키와 구도를 맞추기 위해 약간 앞으로 굽힌 자세다. 그들은 환하게 웃는다. 행복한 가족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런 추위에 아이를 데리고 못 바람을 쐬다니, 역시 젊긴 젊구나. 이만한 추위쯤이야 그들을 방안에 잡아둘 수가 없지. 사람의 한살이에서 맞닥뜨릴 크고 작은 어려움도 그렇게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이겨내기를…….

풍경 넷

남쪽으로 걸어나온다. 찻집 ‘호반’에 가서 차를 한 잔 마실 생각이다. 호반은 못 물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이다. 남쪽인지라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간이 찻집에 둘러앉아 있는데 대개 어르신들이다. 뜨거운 차를 담은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허허허! 소리 높여 웃으시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 해를 넘기시는가. 따뜻한 찻집도 아닌 노점에서 한 잔의 뜨거운 차에 몸을 녹이시는 것인가. 호반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동전 몇 개로 나도 커피 한 잔을 받아든다. 갑자기 쓸쓸해진다.

 

제각각이다. 그 모습들을 보느라 추위도 잠시 잊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손이 시리다. 찬바람에 얼굴도 따갑다. 이젠 집에 가야지. 내 마음에 다가온 풍경 몇 점, 그 속에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그 어느 풍경도 낯설지가 않다. 눈길 가는 대로 바라본 풍경들, 생각해 보니 내가 지나왔거나 지나가게 될 인생의 그 어디쯤인 것 같다. 제각각이지만 동시에 그리 다르지 않은 우리네 얼굴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그 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어느 새 못의 동쪽까지 왔다. 다시 수면을 바라본다. 그만 그만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보여주는 이런저런 모습들을 다 끌어안고도 못 물의 표정은 사뭇 고요하다.

‘성당 못은 펼쳐논 경전이었네.’

강문숙의 시 ‘저녁 산책’에 있는 시구다. 친구여, 수성못도 바로 그 경전인가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