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해진 사인

                                                                                                     정부영

 까만 바둑알 같은 눈동자가 나를 말끔히 쳐다본다. 무슨 요구를 하거나 무언가를 교류하고 싶으면 이렇게 응시한다. 개가 원하는 것이라야 뻔한 것이어서 먹이를 찾을 때가 제일 눈빛이 강하고 놀이나 밖으로 나가고 싶을 때도 눈빛이 반짝거린다. 집에 있으면 애완견은 늘 내 뒤를 따른다. 눈을 맞추고 얘기를 나누는 내 자신이 어린애 같기도 하지만 그러고 나면 가슴이 뿌듯해지기도 한다. 동물과의 사랑과 교분도 사람과의 관계에 버금가게 비중이 커짐을 느낀다. 나이가 든 탓일까.

애완견은 딸에 대한 내 나름의 사랑과 배려이기도 하다. 6년 전 어느 날 다 큰 딸은 손바닥만한 두 장의 누리끼리한 종이쪽을 내게 내밀었다. 공책의 한쪽을 떼어낸 종이에는 연두색 색연필로 띄엄띄엄 쓴 글씨들이 희미하게 번져가고 있었다.

‘학교 들어가면 강아지를 키운다. 엄마.’

다른 한 장의 종이에는 또박또박한 글씨로,

‘대학교에 들어가면 강아지를 기르기로 약속한다. 엄마.’

끝에 사인은 아무렇게나 쓴 내 친필임이 틀림없다. 내놓으면서 딸은 자신도 멋쩍은지 빙긋이 웃고 있었다. 한 장은 유치원 땐가 서툴게 써서 받아놓은 것이고, 다른 한 장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 제가 직접 써서 엄마한테 사인을 강요하다시피 받아 간 쪽지였다.

그때 받아놓은 약속 종이를 버리지 않고 정리함에 고이 간직하고 있을 줄이야. 마지막 카드를 뽑아든 것 같아 나도 계면쩍게 웃었지만, 딸이라고 믿거니 하며 약속을 하찮게 여긴 것만 같아 미안스럽기도 했다.

그즈음 딸은 공허하고 불안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마땅하게 정해진 길을 찾지 못하고 이 궁리 저 궁리로 스산한 하루 하루를 보내었나 보다. 공연히 바쁘게 나다니더니 어느 날은 애견을 키우면 어떻겠느냐고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며 그 종이쪽을 내민 것이다.

이런 제의는 유치원 때부터 있던 것으로, 딸이 애완견을 원하는 비중이나 키우기 싫은 내 정도가 수평을 이룰 만큼 팽팽하여 언제나 말만 오가던 것으로 끝났었다. 딸이 어렸을 시절에는 아파트에서는 개를 키우기가 어렵다며 대신 병아리나 새를 키우자고 어르고 달래어 가라앉혔다. 그러나 햇병아리는 며칠만에 죽어 어린 가슴을 멍들게만 했다. 문조나 십자매, 잉꼬를 키우면서 애완견에 대한 욕구가 사그러들었다가도 새들과는 감정의 교류가 적어 밋밋한데다, 안고 품을 수가 없어 강아지를 늘 짝사랑만 하는 꼴이었다. 딸아이에게는 언제나 봉제 강아지와 개 인형이 선물감이 되었고, 침대 곁에는 그것들이 몇 개씩 놓여 있었다.

엄마의 고집도 완강했다. 눈망울이고 털색, 하는 모양이 보기에는 귀엽지만 안았을 때의 뭉클거리는 촉감에 소름이 돋는 듯했고, 따뜻한 체온이라고 느껴지기보다는 다른 생명체에 대한 이질감으로 섬뜩하기까지 하였으니, 딸아이가 조를 때마다 당혹스러워 피할 궁리만 할 뿐이었다.

딸의 염원과 요구도 대단했다. 엄마가 임기응변으로 이 다음에 키우자고 피한 말을 제 자신이 휘적휘적 글로 적어 사인을 받아 여태까지 두었으니…….

끝내 다 큰 딸에게 열병이 도졌다. 사흘 낮 동안을 충무로 애견 센터에 가서 몇 시간씩 강아지를 들여다보고 돌아와서는 아쉽고 허전한 표정으로 주저앉곤 했다. 앞날에 대한 불안과 내던져진 듯한 막막함, 솟아오르는 열정들을 강아지에 대한 집착으로 풀어내려 했나 보다.

나도 딸이 걱정스럽고 무언가 모를 연민이 밀물처럼 몰려와서 그 쪽지가 아니더라도 간절한 바람을 들어줘야겠다고 마음을 돌렸다. 조금 지나면 결혼해서 훌쩍 떠나버리거나 공부에 뜻을 더 두고 멀리 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바심까지 났다.

요크셔테리어인 지금의 애완견은 생후 2개월 만에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막상 대면을 하니 대소변의 훈련도 걱정거리였고, 사랑으로 보살펴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망설여졌다. 낌새를 알아차린 딸은 하나의 카드를 제시했다. 2개월 간만 키워보고 그때 가서 다시 결정하자고.

얼마간의 빌미를 가지고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속셈은 딸이 막상 강아지를 키워보니 염원했던 것만큼 흡족하지 못하다고 실망하거나 무심해지길 바랐고, 딸 속내는 엄마가 애견에게 그 동안 정이 들어버려 돌려보낼 수 없게 되기를 계산했을 것이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강아지를 덥석 안아버렸다. 이왕 키워보기로 작정한 바에는 빨리 결정을 내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내 마음이 강아지를 키우는 쪽으로 변하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딸은 강아지를 보살펴주며 정성을 기울여가면서 자신의 혼란스러운 마음과 허전함을 서서히 녹여내기 시작한 것 같다. 애완견도 그 심정을 무의식적으로 아는 듯 재롱을 떨고 따르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적이 마음이 놓여갔다. 평정과 여유를 되찾고, 사랑을 더욱 익힐 수만 있다면 애견 몇 마리쯤 못 키우랴 싶기도 했다.

가끔씩 개를 데리고 한강 고수부지를 간다. 운동도 시키고 바람도 씌워줄 겸 잔디밭에 풀어놓으면 날아갈 듯이 좋아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거기서 만난 중년의 어떤 사람은 IMF 때 직장을 그만두고 마음을 잡을 길이 없어 방황하다가 개 한 마리를 벗삼아 그곳을 날마다 배회하면서 차츰 안정이 되고 정리가 되었노라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는 강아지가 큰 힘이 되었노라고.

이제는 내가 우리 ‘모모’를 더 좋아하게 되어 여간 다행이 아니다. 한 식구같이 되어버렸다. 얼마 전에 딸은 인도로 공부하러 떠났고 강아지를 아쉬워할 겨를이 없이 바쁘게 지낸다. 그래도 이메일 끝머리에는 ‘엄마, 아빠, 모모, 안녕’ 하는 인사 문구를 보내는 것으로 보아 애견이 가끔 보고 싶은 모양이다. 오히려 지금은 빈 둥지가 되어 조용하기만 한 우리 집과 나의 쓸쓸함을 달래주고 있다.

선견지명이 있어 이것이 딸이 내게 준 선물인가 보다. 딸이 아쉽고 허전할 때 많은 위안을 준 애완견을 쓰다듬으며 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