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같은 이야기

                                                                                                     최병호

 ㅎ이 돌아왔을 때 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다리던 편지는 오지 않고 불쑥 장본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걱정의 빛이 자욱해졌다. ㅎ은 볼멘 목소리로 좀 늦어질 것이라고 했다.

헐레벌떡 달려온 ㅅ이 숨돌릴 사이도 없이 학교 먼저 가자고 ㅎ을 끌어냈다. 손을 덥석 잡은 담임은 교장실부터 다녀오라고 했다.

“그 동안 넌 염병 같은 독감을 앓은 환자였어” 하는 담임의 말을 등 뒤로 들으며 ㅎ은 떨리는 가슴으로 교장실을 찾았다.

“담임선생님한테 얘긴 좀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전시戰時라지만 졸업시험을 안 본 학생에겐 졸업장을 주지 않기로 했다.”

내리꽂는 교장의 언명에 ㅎ은 할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서 있었다.

“가 봐!”

두어 번 재촉이 있었지만 ㅎ은 이미 굳어진 장승이었다.

교장은 “종일 그렇게 있어 봐라. 별수 있나” 하곤 밖으로 나가버렸다.

ㅎ의 눈에선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 떨어졌다.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뭉그적대고 있었다. 교장이 다시 돌아와 뜻밖에 결시 사유를 물었다.

“저어~ 염병을…, 아니 염병 같은 독감을…….”

“믿어도 되나?”

“네.”

교장은 혼잣말처럼 “하긴 급비생給費生이 졸업을 못한 대서야…” 하고 누그러졌다.

“이놈아,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담임선생님께 여쭈어 개별적으로 간단히 추가 시험을 치뤄. 그리고 그 시험지를 묶어서 내게 가지고 와! 근거를 두어야 하니까.”

교장은 ㅎ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ㅎ의 눈에선 뚝, 또 한 번 눈물이 떨어졌다.

“진즉 그랬어야지, 괜히 야단이더니……. 아니, 사실은 낙제하는 꼴을 보았어야 하는데…” 하고 너스레를 떨던 ㅅ이 재빨리 교무실을 다녀왔다. 한 손엔 두루마리 종이뭉치가 들려 있었다.

ㅅ은 거두절미하고 우선 쫓기는 시간부터 잡자고 했다. 그리하여 ㅅ과 ㅎ은 겁도 없이, 참으로 겁도 없이 ㅅ의 하숙방에서 ‘간단히’ 출제하고, ‘간단히’ 답안을 작성하는 기상천외의 사제가 되었다.

ㅅ은 교장의 마구잡이 ‘결시자 졸업 유보 방침’을 당찮은 옹고집이라고 했다. ㅎ의 경우, 담임이 병결자로 간주하고 평가 규정대로 처리를 잘 했는데 공연히 야단이었다는 것이다. 담임도 생각은 같았지만 어쩐지 묵묵했다는 것이다.

ㅎ은 교장실에 갈 일이 죽을 맛이었다. ㅅ이 척후병처럼 앞서 가 교장실 문을 드르르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ㅎ은 한숨을 내쉬며 답안지를 가만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ㅅ이 재빨리 그것을 가로챘다. 담임에게 맡긴다는 메모만 남기자고 했다. ㅎ은 그대로 따랐다. ㅅ이 또 교무실엘 다녀왔다. 담임이 어깨를 두들기며 빨리 원서나 써 오랬다고 좋아했다.

ㅎ은 부산했던 몇 날이 꿈결만 같았다. 그 이전의 일들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ㅎ은 그때, ㄹ선생을 따라 일본엘 가기로 했었다. 국교國交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가는 길이 복잡했다. ㄹ선생이 활어 수출선의 사무장이 되어 ㅎ을 그 배에 태워, 일본에 사는 ㄹ선생 삼촌에게 먼저 인계하고, ㄹ선생은 그대로 몇 번 더 현해탄을 넘나들다가 적당한 기회에 합류한다는, 그런 시나리오였다. 말하자면 일종의 밀항이요 탈주였다.

졸업 시험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마침내 ㄹ선생이 배를 타게 된 것이다. ㅎ은 출항에 따른 여러 지시를 받았다. 먼저 ㅅ과 함께 담임을 찾아갔다. 사정을 묵묵히 듣고 있던 담임은 ㄹ선생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다며, 쾌히 장도를 빈다고 했다. 졸업 문제 같은 건 걱정하지 말고 도착하자마자 편지나 빨리 하라고 했다. ㅎ은 집안 어른들에게도 인사했다. 동구 밖을 나설 때, 손에 든 보스턴 백이 이상하게도 무거워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ㅎ이 도착한 곳은 꽤 덩실한 기와집이었다. 그곳은 ㄹ선생의 처가였다. ㄹ선생 장모되는 분이 어떻게 활달하고 친절한지 ㅎ은 전혀 서먹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밤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ㄹ선생은 일본에서 와야 할 배가 오지 않는다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이야기가 점점 달라졌다. 처음엔 선주도 궁금해 한다더니 나중엔 무슨 사건에 연루되어 배가 억류된 상태라고 했다. 곧 풀리지 않겠느냐더니 결국 재판에 회부될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ㅎ은 쌀쌀한 푸른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는 몇 날을 보내야 했다.

마침내 ㄹ선생이 단을 내렸다. 사정투에 가까운 목소리로 아무 대학이나 들어가서 우선 ‘전시 학생증’을 받고 보장된 신분으로 느긋하게 기다리자고 했다.

“원서 마감이 끝났는데…….”

그러나 ㅎ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곧 보스턴 백을 담담히 챙겨들었다. ㄹ선생 장모되는 분의 위로와 격려 속에 보스턴 백이 이상하게도 가볍게 느껴졌다. ㅎ은 남의 유학 길에 무임승차하려다가 속절없이 좌절된 묘한 꼴이 되고 말았다.

돌아온 ㅎ은 ㅅ과 담임의 호의로 일단 ‘발등의 불’은 껐지만 내내 불안을 씻을 수 없었다. 원서를 어떻게 추가로 넣을 수 있을 것인지 답답했다. 또 그게 그리 된다 해도 합격하지 못하면 그 망신을 어찌할 것인지 막막했다.

수험표를 나눠주던 날, ㅎ의 이름은 불려지지 않았다. 화급히 ㅅ은 담임에게, 담임은 대학 본부에, 고리잇기 비상이 걸렸다.

ㅎ은 눈을 감고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찬 기운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몇백 시간이나 흘렀을까. ㅅ이 함박꽃 얼굴로 달려왔다. ㅎ은 ㅅ의 손을 꼭 쥐었다. 함께 고사장을 확인했다.

6·25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와중에 ㅎ은 그렇게 고교를 졸업하고 ㅅ과 함께 대학엘 들어갔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얘기다. 그런데도 ㅎ은 이따금 그때의 그 정의情義를 흐뭇하게 떠올린다. 그리고 혼자서 가만히 미소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