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季 評 ─

(본지 2002년 봄호)

 수필 문학 방황기

                                                                                              박장원

 수필은 삶의 투영이며, 그것의 문학적 통찰이어야 한다.

누구는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라’ 하였고, 누구는 ‘나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방관자로 존재한다’고 하였다. 수수방관의 나태한 체념이 아닌 달관에 이른 빈 배의 허허함, 그리고 지성과 감성은 대부분의 교양인이 너나없이 주장하는 정신적 자부심이지만, 인생사상에 대한 높은 견식의 태도로 고백하는 내성內省의 확보가 손짓만으로 다가서는 먼 산은 아니기에, 차분한 삶에의 외경이 작가의 표상일 것이다. 수필가들이 이를 간과할 경우 속물이니 아마추어적 발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수필은 달관의 철학이 상상의 문학에 은근히 접맥되는 까다롭고 정교한 장르이다.

무릇 인생 자체가 애매함이며 생로병사의 얼개를 우리는 훌쩍 벗어나지 못한다.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상상력의 절대의식을 성취하게 되며, 상상력의 실존적 의의는 예술적 직관과 관련된다고 하였다. 삶에 대하여는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오직 한 가지, 즉 죽음에 대해서만 확신할 수 있는 우리의 실존은 구도자 같은 심상心象의 추구에서 선명해질 것이다. 때문에 달관의 철학이 배어 있는 삶의 주제에다가 한계적 상황을 극복하는 상상을 아름답게 형상화한다면 수필이 수필로서 존재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계간 수필> 2002년 봄이 왔다.

봄의 시작은 겨울의 끝이니, 가는 아쉬움과 오는 설렘은 계절의 경계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전쟁의 신’이 되었다는 먼 나라 이야기도 있지만, <계간 수필>의 봄은 국경의 시인 김동환의 ‘대통령께 드리는 관’을 필두로 마치 의도된 편집처럼 본의 아니게 늙음과 죽음이 만연하였다. 그렇지만 푸른 젊음이 방치되지도 않았다.

 

태백산에 오른 적이 있다. 늙은 주목朱木의 군락群落을 가리키며 안내자는 “살아서 천 년, 죽어서도 천 년”이라고 자랑하였다. 늙을수록 더욱 멋있어 보이는 것은 주목만이 아니다. 마을 어귀의 거대한 느티나무도 그렇고, 바닷가의 삭풍朔風을 이기고 살아 남은 노송도 그러하다. 현대 사회에도 거목巨木을 닮은 인물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이리 왜소矮小의 길에서 옥신각신하는가?

─ 김태길의 ‘늙는다는 것’ 중에서

 

괜히 왔다 간다며 삶을 자조하긴 이르고, 오로지 평안한 떠남만을 준비하는 것이 인생은 아니기에 생명의 순환이 힘겨울밖에. 가뭄이나 태풍을 두려워만 한다면 진정한 농부가 아니듯이, 늙음이 조만간 찾아온다는 사실에 고민하는 젊음을 건강하다 여기지 않았다. 옥신각신 오늘에다가 내일을 보태는 먹이사슬의 순환을 담담히 바라보면서,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가는 삶의 멋을 왜소의 길에서 찾아 헤매는 아쉬움에는, 대낮에 초롱불을 들고 진실한 인간을 만나려 했던 철인의 엄숙한 얼굴이 겹쳐진다.

며칠 지내는 동안에 집안에 날아드는 까치 떼 중에 흰 까치가 한 마리 있는 것을 알았다. 그 날 이후에는 흰 까치 오는 시각을 기다리는 일이 일과 중의 하나가 되었다. 갈매기 떼가 양식장에서 참선방을 차리어 그들을 흉내내는 것만으로도 하루 일과가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이것저것에 재미가 붙자 날마다 다른 서사시를 읽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사이에 단조로운 서정시 같은 동해안을 까마득히 잊게 되었다.

─ 안인찬의 ‘남해안은 서사시지요’중에서

 

남해의 둥지를 찾는데 노심초사 무려 8할을 할애하였기에, 단순한 구성에 힘찬 끌림은 있다. 그러나 튼튼한 둥지 안에서 서사시를 품었지만 분명 부화의 어려움이 있다. 동해안을 서정시 같다고 하는 과감성에 눈길이 머물지만, 시어들이 차분하지 않다. 갈매기 떼가 양식장의 참선방에서, 그들을 흉내내는 것에서는 정작 참신한 서사가 필요하였다.

 

무거운 짐을 들고 낑낑거리면서 올라왔을 때 문 앞에 삼월의 첫 신문이 와 있는 게 눈에 띄었어. 예약한 날짜에 정확하게 배달된 신문을 보니 그간 멈추어 있던 이곳 일상의 시간도 일제히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 같았어.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지. 그런 다음 내 손목의 시계를. 그것은 네가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시차가 나는 네 나라의 시각이었어. 순간 네게서 너무나 멀리 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슬퍼졌어.

─ 이오라의 ‘오버랩’중에서

 

매끈한 서사에 아련한 정서가 깔리면서 프리첼과 화자가 일치되어 신비적 이미지로 빛을 발한다. 너무나 멀리 떨어져버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슬픔에 겨워 그에게 달려가겠다고 하였지만, 감정을 삭이면서 습습한 회색 하늘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그 촉촉한 잔상이 세련되었다. 오버랩의 탄생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학교 지하 카페테리아에서였다.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던 나의 언니와 그의 친구가 마련한 일종의 소개팅이었다. 어두운 조명 탓이기도 했겠지만 어찌나 얼굴이 검은지 사람은 안보이고 하얗게 웃는 잇바디만 보였는데, 그게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중략) 한인 타운 한복판에 있던 그 낡디 낡은 아파트가 떠오른다. 삼층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층계에는 한때는 아름다웠을 붉은 융단이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깔려 있고, 다 꺼져 가는 마룻장은 발 밑에서 삐걱거리며 신음 소리를 냈다.

─ 최순희의 ‘만종’ 중에서

 

사실적 표현과 소설적 기법이 어우러진다. 삐걱거리며 신음 소리를 내는 마룻장은 귀에 익지만, 사람은 안보이고 하얗게 웃는 잇바디가 눈에 밟힌다. 저녁 종 소리가 울려퍼지는 황혼녘 들판, 구수한 시래깃국이 끓고 있는 밭가 허름한 식당에서 기도하는 부부가 선하지만, 이제는 나만의 은은한 종 소리가 듣고 싶다.

 

돈을 준다니 우선 반가웠으나 이내 떨떠름한 기분에 휩싸였다. 얼마 산 것 같지도 않은데 노인 대우를 받아야 하다니 어쩌면 좋은가. 인생이란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뛰어오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밀려나 분장실 거울 앞에 앉아 주름진 얼굴을 들여다보는, 그런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 동안 더러 할머니라 불릴 때에도 내가 나이 들었다는 것을 애써 고개를 흔들어 부인하려 했는데, 이제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도장을 찍어주겠다는 것이다.

─ 오경자의 ‘노인의 대열에 들어서면서’ 중에서

 

노인의 대열이라 하였지만, 발걸음은 날렵하다. 지하철과 노인을 대비시켜 삶의 회한을 유인하지만,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며 설전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미소가 번지고, 매표구 안에서 날아 나오는 경로우대권, 표현이 생경하다 못해 발랄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젊은이보다 빠르고 주저도 없다. 밀려나 거울 앞에 앉아 주름진 얼굴을 들여다보지만, 인생무대의 봄은 화사하니 밋밋한 일상에서 시나브로 멋을 찾았다.

 

모래내에는 대장간이 있습니다. 4대문 안은 아닐지라도 어쩌면 서울이란 도심 안에 마지막 대장간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대장간 장씨의 일을 칭찬했습니다. 쇠를 아끼지 않아 물건이 실하고 뒤처리도 깨끗해 모양도 좋다고. 사람들이 생활용품으로 쓰는 쇠 물건은 모두 큰 공장에서 나오는 호사한 모습의 물건을 쓰지만, 농사짓는 물건이나 집을 짓는 쇠 장비들은 아직도 대장간이 좋습니다.

─ 한원준의 ‘대장간’ 중에서

 

개성이 강하고 실험적인 문제작이다. 서울에선 거의 사라져간, 철길 건널목 옆 대장간 이야기가 장르의 경계를 넘어 동화처럼 들려온다. 대장장이 장씨의 몸통을 부각시키려 주변을 온통 오함마로 뭉뚱그린 무모함도 있다. 장씨 주변인물의 다양한 설정에서 허구와 상상이라는 케케묵은 논쟁의 재연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실험의 건널목을 건너다보면 또 다른 세계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디지털 세상이다. 남들도 다 알고 있는데 혼자만의 세계인 양, 정을 펼친다면서 과거로 달려가 주관도 달관도 없는 방관자적인 다정多情을 호소하는 것은 득보다는 실을 취하는 소모적인 행위이다.

난蘭이나 매梅를 대상으로 하여 글을 쓸 때 그 소재의 힘 때문에 그 글은 어느 정도 기품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 중엔, 이런 것을 소재로 하여 글을 써 놓고는 마치 자기의 글재주인 양 착각하는 꼴을 가끔 목도할 수 있거니와 이런 사정은 수목에 관해서도 거의 같다는 어느 평자의 수필에 대한 충고를 그저 인신 공격 정도로만 받아들인다면 관중 없는 운동경기처럼 독자와의 틈은 더욱 벌어질 것이다.

문학의 보편적 진리란 없고 작가의 특권이나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며 독자들과 더불어 공동 창작에 임해야 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반영하자면, 에세이의 본령이 색다른 시도를 추구하기에 그곳에는 정해진 길이 없고, 작가의 지위나 경력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부담이 될 수도 있고, 오랜 시간 독자와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온 수필의 미래는 투명하면서도 탄력적이다.

수필의 태생지는 저자가 드러나든 숨어 있든 1인칭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한계적 자전적 문학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는데 객관적으로 치밀하게 묘사하는 문체에다가 사실주의를 답습해야 하는, 몇 세기에 걸쳐 반복된 좋게 말하면 친숙하고, 나쁘게 말하면 뻔한 문학이다. 그런데 수필가들이 고전적인 답습에도 못 미치고, 온라인 정보시대에 아날로그 체계에만 안주한다면 역행의 소외된 존재로 남을 것이다.

달관의 철학과 상상의 문학인 수필은 지금도 방황하고 있다.

 

 

 

 

 

박장원

<수필문학>과 <계간 수필>로 등단(2001년). 수필평론가.

수필집 『양수리』, 수필평론집 『코끼리 이야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