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즙을 마시며

                                                                                                    홍순숙

 녹즙을 마신다. 나를 살릴 생명수라고 생각하며 녹즙을 마신다. 푸른 수액이 위를 지나 간을 에워싸면 목마른 자의 갈증이 풀리듯 간은 고통에서 풀리며 고마워하리라. 녹즙을 마시면 호흡이 가라앉듯 간도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나는 녹즙을 마시기 전에 명상을 한다. 기도를 한다. 녹즙 한 컵을 앞에 놓고 이리저리 컵 속을 관찰하기도 하고, 녹즙이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또 어린아이가 먹기 싫어하는 약을 참고 먹듯이 눈을 꼭 감고, 맛없고 씁쓸하고 밍밍한 맛의 녹즙을 들이키며 기도한다.

‘나를 위해 헌신하다 지친 간을 살려주셔요. 과로하지 말며 노하지 말며 흥분하지 말며…….’

나는 나의 신앙이 된 녹즙 마시기에 희망을 걸고 있다. 만일 지금이라도 녹즙 마시기를 중단한다면 내 생명선은 서서히 끊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힘이 들어도 날마다 녹즙을 만들며 녹즙을 마신다.

지난 겨울은 집안에서 보낸 나 혼자만의 삭막한 시간으로 채워진 생활이었다. 수필집 상재를 위한 몇 편의 원고를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자료를 정리하며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 2개월마다 채혈 검진하는 C 형 간염 정기검진에서 간경화의 진단이 내려진 것이다. 만성간염으로 진단된 지 10년이 되는 해이니 올 것이 왔구나 했지만, 갑자기 맥이 풀렸다. 그 동안 채혈하는 간격이 6개월에서 3개월, 2개월로 좁혀지는 것을 보고 좀 의심스러웠지만 의사를 믿고 있어서 조금은 마음을 놓고 지냈었는데.

어느 날 “선생님, 왜 저는 2개월마다 채혈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만성으로 된 지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간이 살짝 굳었습니다” 했다.

“그럼, K 박사님이 말씀하신 나의 74세 한명限命이 맞겠네요?” 했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것이 아닌가.

74세의 한명 ─ 그것은 5년 전에 들은 말이다. 나는 지금 70세 쪽으로 바짝 다가서고 있다. 그런데 그 나이도 못 채울 것 같아 가슴에 구멍이 뚫린다.

현재 C 형 간염은 특효약이 없다. 10년 동안 한 병원을 정해 놓고 간염관리를 철저히 해왔건만 특별한 치료가 없었으니 이 지경이 되게 내버려 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말기 만성간염의 결과가 나타나리라고 우려는 했으나 막상 당하고 나니, 바이러스가 정확하게 진행하는 과정 앞에 무력하고 허망하기만 했다.

J 병원에서 나의 의무기록 카드를 발급받아 보니 간경화 증세는 1년 훨씬 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신체에서 중요한 혈소판이 15만에서 35만인데, 나는 9만으로 푹 떨어져 있고, 백혈구가 반으로 낮았다.

선생님의 말씀만 믿고 검진만 한 게 무슨 소용이 있었나. 이래도 의사를 믿어야 하나. 간경화든 간암이든 죽기까지는 상당한 기간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두려움에 몸이 떨려왔다.

나의 종말이 오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나는 아직 못다 한 일이 많으며,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성치 못한 아들의 삶의 대책도, 나의 마지막 몸을 맡길 곳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의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더구나 4년 전에 작은동생이 간경화로 59세에 타계하여 아직도 그 충격과 여파로 우리 집안의 슬픔이 가시지 않고 있는데 나에게 내려진 진단은 마치 사형선고처럼 두 다리를 후들후들 떨리게 했다.

병원에서 C형 간염에 특별한 약이 없다고 해서 굳어가는 간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나에게 급선무다. 누구에게나 삶은 소중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재산을 털어서라도 죽음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가.

나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떨 필요는 없다고 마음을 다져먹었다. 5년만 더 건강하게 살 수만 있다면 내 몸을 사랑하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고 싶은 것이다.

간경화는 옛날에 1년 내에 죽는 불치병으로 취급되었으나 요즈음은 대체의학 식이요법으로 새로운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대체의학요법을 통해 간질환 치료에 큰 효능을 보고 있는 건강가족동호회의 식단에 따라, 몸의 자연치유력을 키우기 위한 식이요법을 시작했다. 그것이 녹즙 마시기다. 그래서 하루 세 번 공복에 녹즙을 마신다. 녹즙 속에는 비타민을 비롯한 다양한 무기질과 함께 여러 가지 효능을 지니고 있고, 항 산화작용을 하는 성분들이 있다고 한다.

건강동호회에서 케일, 신선초, 돗나물, 민들레 같은 신선한 야채를 공급해 주어서 녹즙기로 갈아 만든다. 나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작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힘들고 지겨운 일이다. 시간 지켜서 식품 약까지 하루 여섯 번을 먹어야 하니 때때로 시간을 놓치기 일쑤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외로운 길, 나 혼자의 길, 외부와 단절된 고립된 생활에서 나는 약보다 녹즙에 매달려 사는 기분이다. 친구들의 안부 전화나 미국의 딸에게서 사흘이 멀다고 걸려오는 전화는 녹즙보다 더 큰 치료제로 마음의 평정을 가져다주는 보약임을 의식하면서.

반드시 나으리라는 기대와 신념으로 3개월간의 식이요법을 하는 중에 채혈검사 결과 혈소판이 10만으로 상승했고, 여러 분야에서 현저하게 호전된 기미가 보였다. 정상 수치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기대한 만큼의 현저한 차도에 새로운 힘이 생겼다. 의사선생님도 기뻐하며 희망을 보였다. 나는 녹즙을 마신 결과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요즘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죽음의 터널에서 삶의 희망을 낚아 올린 듯 그 동안 덮어두었던 책도 읽고 싶고, 과제처럼 안고 있는 수필 원고도 다시 쓰고 싶은 마음이 일고, 모임에도 나가서 건강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기분이다.

꾸준히 정기검진을 하지 않는 사람은 초기에 간경화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한다. 통증이 없으므로 복수가 찬다던가, 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는 증상이 나타나야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하니, 그런 사람에 비기면 나는 얼마나 다행인가.

나의 간은 간염 바이러스에 침범당하여 염증을 일으켜 10년간의 만성 C 형 간염 단계를 거쳐 간경화가 된 단계까지 지켜보고 있으니, 나의 간은 나와 절친한 친구가 되어 있는 셈이다.

건강한 간을 만들어야지. 삶의 끝자락에서 체내의 기관이 쇠락하고 최후의 맥박이 멈추는 순간까지도 나는 간에 매달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내가 지금처럼 살아야겠다고 새록새록 가슴 속을 파고드는 전율을 느껴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인간이 만들어 낸 해로운 환경이 끊임없이 자연을 위협하고 있어도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너무나 많다. 숲 속의 맑은 공기가 그렇고, 자연의 푸름이 그렇다. 살아 있는 자연이 내게 있음이 얼마나 다행이며 고마운 일인가. 비타민이 풍부한 푸른 야채를 갈면 저 설원의 포말 같은 거품을 토해내면서 녹즙이 생긴다. 푸른 녹즙을 보고 있으면 괴로움도 슬픔도 모두 삼키고 마음을 닦는 인내로 자연과 합일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자연에 의지하여 새로운 내일이 존재하기를 기도한다.

지금, 창 밖은 봄비가 내리고 있다. 이 봄비가 대지를 적시면 마른 대지는 봄비를 마시고 푸른 생명으로 피어나리라.

 

 

 

홍순숙

<시대문학>에 수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저서 『내 사랑 석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