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신사

                                                                                             배혜숙

 나원리 가는 길엔 언제나 기차를 만난다. 동해남부선이다. 기적을 길게 울리고 천천히 지나간다.

오래 전 이 순백의 신사를 만나기 위해 시골 마을을 찾을 때도 첫 이정표는 나원리 역이었다.

경주 시내에서 안강읍으로 가는 길에 있는 나원리 5층탑을 찾아가는 3월의 한낮은 햇살이 눈부셨다.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팝콘처럼 터트리는 날에 우리는 그를 만나러 갔다. 멀리서도 늠름한 그의 모습이 보였다. 다가갈수록 가슴이 뛰었다. 잘생긴 모습에 압도당해 묵묵히 좁은 밭길을 올라갔다.

순백의 화강암은 1천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대로이다. 처음 태어난 그때처럼 이끼도 없고 색도 바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백탑이라 부른다. 그가 서 있는 언덕자락에 아지랑이가 일렁인다. 봄은 누운 들풀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순백의 영원함에 경배케 한다.

좁은 농로를 조심스럽게 따라가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빨갛게 익어가는 딸기를 보았다. 백탑을 만나러 갈 때의 내 마음도 그렇게 수줍음으로 빨갛다.

그는 큰 절집에 있지 않다. 한길에서는 절대 볼 수 없다. 조금은 찾기 어려운 구석진 곳이라서 마음에 든다. 그리울 때 찾아가는 님이라면 은밀한 장소여야 한다.

몸집이 큰 그는 거대하지만 미련하지 않고 날렵하다. 통일신라 석탑 중에서도 우람한 5층이라 쳐다보면 목이 아프다. 하긴 사모하는 대상이라면 당연히 목 아프게 올려다보아야 한다. 정제된 아름다움을 갖추었고 위엄이 서려 있다. 그 앞에서 나는 점점 낮아진다.

화창한 봄날 결혼식을 올리는 흰 턱시도를 입은 신랑의 모습이다. 새 옷이지만 어색하지 않고 몸에 잘 맞다. 순수함이 돋보인다. 아니 나비 넥타이를 맨 초로의 신사 같기도 하다. 의젓한 모습이 편안하다.

가까이 다가가 만져본다. 경배의 대상이지만 만져봄으로써 흠모의 대상으로 삼는다. 손으로 전해지는 따스함이 가슴까지 깊숙이 들어와 박힌다. 부처의 말씀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를 올려다 볼 때 측면을 택한다. 양면을 보기 위해서다. 그의 두 얼굴은 역시 우아하다. 비례가 잘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한없이 올려다본다. 그를 이렇게 아름답게 다듬은 신라의 석공은 누구일까? 그 석공의 가슴 넓이와 깊이를 이 탑을 통해 넉넉히 재어본다.

처음 그를 만나러 온 것은 초겨울이었다. 미처 두터운 옷을 꺼내 입지 못해 가을 옷을 입고 왔다가 지독한 감기를 얻어 갔었다. 그 겨울 내 감기를 앓았었다. 그리고 나원리를 다시 찾던 봄에는 두툼한 털 스웨터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왔었다. 목이 따뜻해서 그와 마주 대하기가 훨씬 즐거웠다.

3월 햇살이 부드럽다. 탑 주위에 심은 사철나무 잎에 무당벌레가 봄나들이를 나왔다. 그 녀석들도 부처의 세계가 포근한 것을 아는 모양이다. 탑 기단부의 벌어진 돌 틈으로 개미들이 기어나오고 있다. 주변은 종일 햇살이 내리쬐는 곳이다. 식물도 동물도 탑과 나란히 햇살을 머금어 빛난다.

탑 뒤로 예전에 금당이 있고 불법의 세계가 장엄하게 펼쳐졌을 테지만 지금은 흔적이 없다. 다만 그 주변의 밭이며 대 숲에 깨진 기와 조각들이 널려 있을 뿐이다.

아름다운 신라 기와가 이곳에서 발견되었으니 그가 살았던 통일신라의 영화를 어렴풋이 감지한다. 그 옛날 옛적에도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이 있어 그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가 선 주변으로 풀들이 정겹다. 탑이 만든 그림자를 그늘삼아 앉으면 종일 무념 무상 그대로 충분히 편안하다. 어느 해 여름 오후 그렇게 탑 그늘에 앉아 어둠이 깔릴 때까지 함께 있었다.

1996년 해체 수리되었을 때 3층 지붕 돌에서 금동 사리함이 나왔다. 사리함 특별전이 열리는 불국사로 여러 번 영롱한 구슬을 보러 갔었다. 그 뒤 순백의 탑에 마음을 더 주었는지 모른다.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와 깊이 앉아버렸다.

3월 하늘을 이고 선 5층탑을 바라본다. 가슴 메이는 그리움이 출렁인다. 건장한 청년의 팔뚝처럼 힘이 있다. 기대고 싶다. 그럴 때는 마음을 한 곳으로 모은다.

푸르른 날, 나원리를 찾아 가 보자. 조그만 역사를 지나고 철길을 건너고 좁은 논길을 지나면 우뚝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신사를 만나게 된다. 그랑 마주하면 금세 그리움이 인다. 혼자 보다 둘이면 더 좋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해거름녘 이별을 한다. 그와의 작별 인사는 유난할 필요가 없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달려갈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만나는 날은 달밤이 될 것이다. 보름밤에 그를 보러 올 것이다. 그땐 꼭 동행이 필요하다.

사람을 포함한 만물에게 최상의 찬사는 ‘눈부시다’라고 누가 말했다. 밭둑을 걸어 나오면서 뒤돌아보았다. 그의 모습은 여전히 눈부시다.

 

 

 

 

 

배혜숙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77년).

수필집 『목마할아버지와 별』, 『양파 썰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