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비우고 그녀는 채우고

                                                                                                        서 숙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가에 대하여 두 사람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나는 말한다. “좋은 영화란 모름지기 우리로 하여금 회색 뇌세포를 움직여 생각에 잠기게 하는 것이야.”

그는 말한다. “무슨 소리야. 골치 아픈 영화는 질색이야. 살아가는 매일 매일이 골치 아픈 일투성이인데, 영화까지 그런 걸 본단 말이야? 좋은 영화란 그런 게 아냐. 영화를 볼 때면 정신없이 몰두해서 볼 수 있게 재미있어야 하지만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무슨 영화를 봤는지조차도 생각나지 않는 영화가 진짜 좋은 영화지.”

영화 한 편에 대한 견해가 다른 것처럼 두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태도 또한 판이하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쓸데없는 것으로 머릿속을 채우느라고 바쁜, 공연스레 복잡한 여자다. 언제나 이것저것 알고 싶은 게 많아서 개론槪論의 홍수 속을 헤매고 다닌다. 사소한 것마다 일일이 의미부여하고 부연 설명하며 분석하고 따진다. 그러면서 보태고 채우려고 애쓴다.

반면에 그는 대체로 잊고 털어내며 살아가는 편이다. 단순 명쾌하게 자신의 관심사를 고정시켜 놓고 그 틀 안에서 흔들림이 없다. 서민으로 태어났으니 서민으로 살다가 서민으로 죽고 싶다는 그의 소망처럼 물심양면으로 그지없이 투명 담백하고 소박한 사람이다. 말수가 적고 표현력이 부족한 그를 놀리느라고 “그렇게 평생을 몇 개 안 되는 어휘만 사용하고 살면서 갑갑하거나 아쉬운 점이 없습니까?” 하고 내가 마이크를 들이대는 시늉으로 인터뷰를 청했더니, “전혀 불편하지 않음” 하고 예의 한정된 어휘로 전보문같이 응답한다.

그래도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가끔은 재미있는 조어造語 실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머리카락에 흰머리가 늘기 시작할 때였다. 그는 일찌감치 잿빛이 되어버린 자기의 머리가 세기 시작했을 때보다 더욱 심란해 했다. 아마도 흐르는 세월이 거듭 새삼스러웠나 보다.

“어, 여기 흰머리 또 보인다” 하며 뽑으려고 덤볐다.

“아니, 안 돼. 지금 흰머리가 문제가 아냐. 흰머리거나 검은머리거나 간에 숱이 줄어드는 게 더 큰일이니까 뽑지 마시오.”

“어이구. 그러니까 등소평의 흑묘백묘黑猫白猫(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건 쥐만 잘 잡으면 된다)가 아니라 서숙의 흑모백모黑毛白毛(흰머리거나 검은머리거나 숱이라도 많으면 다행이다)란 말이지.”

영화 ‘러브 레터’를 같이 보러 가자고 했더니 “아니, 왜 하필이면 일본영화냐”고 마땅치 않아 했지만 보고 와서는, 내가 영화 속 여주인공을 흉내내어 “오겡끼데스까(잘 지내십니까?)” 하고 집 이쪽 끝에서 손나팔을 만들어 외치면 집 저쪽 끝에서 그가 화답하곤 했다. “안 겡끼데스.”

아무튼 그에게 내가 붙여준 타이틀은 ‘행복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다. 그는 별다른 갈등 구조가 없는 사람이다. 저 길로 갔으면 했는데 결국 이 길로 오고 말았다던가, 진짜 자기가 원한 것은 저것이었는데 운명이나 환경 탓에 이리 되고 말았다는 큰 회한이나 미련은 별로 없는 듯싶다. 남에게 지기 싫은 경쟁심에서가 아니라 그저 공부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계속 하다 보니까, 그것이 별 무리없이 생계 유지의 방편으로 이어졌다. 거기다 더불어 나름의 사회적 지위도 따라온 셈이 되었다.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도 그런대로 만족하며 살 수 있으니 그만하면 행복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행복하다’는 어감이 주는 낯설음 때문인지, 정작 그는 이 타이틀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영국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1904~1991)의 소설 『사건의 핵심(The heart of the matter)』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우리 부부의 모습과 유사한 점이 있다. 남편 스코비는 살아가면서 지니고 있는 물건들을 되도록 하나씩 줄여가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아내 루이스는 집안을 책과 장식품 등 여러 가지 물건들로 가득 가득 채워가며 산다. 나는 루이스처럼 채우고 그는 스코비처럼 비운다.

이제마가 분류한 『사상의학四象醫學』에서의 여러 유형 중에 매우 저축성이 강한 부류가 있다. 이들은 체질적으로 저축을 좋아해서 몸에 여분의 살을 비축하고 사는데, 그뿐만이 아니라 성격이나 생활습관도 쌓아두고 모으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내가 아마 그런 유형의 사람인가 보다. ‘검소한 생활 속의 고원한 사색’이라든가, ‘말은 간결함을 으뜸으로 친다’라는 경구를 무척 마음에 들어하는 한편 나는 어쩌면 그렇게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관념적으로나 현실에서나 이 많은 것을 끌어안고 사는지 모르겠다.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이런 우문愚問을 사랑한다.

“왜 살기는? 그냥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사는 거지.”

그의 현답賢答은 간결 명료하다.

“이렇듯 여러 면에서 서로 동떨어진 생각을 하면서도 부부라는 이름으로 몇십 년을 같이 살기도 하는 거야.”

의견이 어긋날 때 내가 하는 말이다.

“그래, 맞아.” 그가 흔쾌히 동의한다. 결국 이 시점에서 우리의 의견은 전적으로 일치한다. 나는 복잡하고 그는 단순하다. 그가 하얀 캔버스라면 나는 그곳에 내 마음대로 색칠 범벅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쌓고 그는 그것을 묵묵히 견딘다. 그가 마련해 놓은 공간 속에서 내가 울타리 안의 자유를 즐긴다. 비울수록 넉넉해지고 채울수록 빠듯해지는지 그는 늘상 나보다 좀더 여유가 있는 모습이다.

혹시 모를 일이다. 비워야 만이 채울 수 있는 것이기에, 그가 비워놓은 곳을 내가 채운다는 것으로 어쩌면 우리 부부가 어느 날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지극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서 숙

<계간 수필>로 등단(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