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속의 산행

                                                                                                  李尙圭

 산행山行이라고 하면 으레 날씨가 그런대로 괜찮은 날에 하는 것이 보통이고, 적어도 비가 오지 않는 날에 하는 것이 예사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 저녁의 일기예보대로 보슬비가 내리고 있어 계획했던 산행을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미리 한 약속을 깰 수도 없어서, 우산을 들고 산에 오르기로 했다. 마음을 정하고 막상 나서고 보니, 그런대로 별미가 있어서 좋다.

서울 근교의 산은 주중에도 산을 찾는 사람들로 퍽 붐비는 것이 보통인데, 산에 들어서고 보니 비 때문인지 별로 사람이 없어 단출하여 좋았다. 어디 그뿐인가? 산을 뒤덮은 낙엽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어우러져 나처럼 무딘 사람도 묘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지난 가을에 떨어져 쌓인 낙엽 위에 촉촉하게 빗물이 스며드니, 낙엽의 처지에서는 얼마나 고맙겠는가?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면서, 오히려 생기가 도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적당히 내리는 보슬비 속의 산행의 맛은 별다른 데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도봉산 계곡에는 유별나게 큰 바위가 많다. 큰 집채덩이만한 것도 수 없이 골짜기에 널려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대여섯 명이 그 위에 둘러앉을 만한 것도 하나 둘이 아니다. 언제 내린 것인지 알 수 없는 눈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바위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니, 얼마 남지 않은 눈이 맥없이 풀려 내리는 것이 마치 폭포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빗물과 눈물이 뒤섞여 흘러내리는 꼴이 제법 볼 만하다.

빗방울 소리에 함빡 젖어들어 무심코 한 발 한 발 떼어놓고 있는데, 멀린 산사山寺에서의 목탁 소리가 귓전에 와 닿는다. 비에 젖은 산 속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목탁 소리는 참으로 야릇한 느낌을 준다. 딱따구리가 부리로 나무를 쪼는 소리 같기도 하고, 허공에서 울려오는 범음梵音처럼 들리는가 하면, 이 세간의 티끌을 털어내는 소리처럼 느껴진다. 목탁 소리에 귀를 빌린 채 떼어 옮긴 발길이 어느덧 무문관無門關 앞에 와 있었다.

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 공양을 마친 다음, 하산하려 하자. 圓空 스님께서는 자기의 지팡이를 건네주시면서 짚고 내려가라고 하신다. 하기야, 다른 때 같으면 산행에 나설 때에는 으레 지팡이를 챙겼지만, 오늘은 우산 때문에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 같아 그냥 올라온 것을 스님께서는 벌써 알아채신 것이다. 두세 차례 사양을 했지만, 그분의 고집도 웬만한 정도가 아니어서 굽힐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비 온 뒤의 산은 특히 미끄러우니 짚고 내려가서 주차장 옆 공중화장실 뒤에 세워두고 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스님께서 하산하셨다가 돌아오시는 길에 짚고 오시겠다는 것이다. 내가 혹시 누가 집어갈지도 모르지 않느냐고 하자. 이까짓 지팡이를 누가 가져갈 이도 없고, 혹시 가져간다면 그 사람도 필요해서 가져갈 것이니 그것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염착染着을 멀리한 선승禪僧의 꾸밈없는 마음자리를 보는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산행은 윤택하게 된 것 같아 흐뭇하였다. 다리가 셋이 된 하산 길은 거리가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이상규

변호사. 환태평양변호사협회 부회장. 전 문교부차관. 고려대 법대 교수.

저서 "신행정법", "행정소송법", "금강경의 세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