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의 선물

                                                                                                   오경자

 지난 봄 친지의 초청으로 미국 여행을 하던 중,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계시는 작은고모 댁을 방문하여 며칠 묵게 되었다.

고모는 올해 팔십육 세의 노인으로, 아들과 손녀딸과 함께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계셨다. 심장에 인공 박동기까지 단 허약한 몸으로 십 년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동양화에 취미를 붙여 여러 가지 꽃과 호랑이, 말, 닭, 공작새를 그리고 전시회에도 출품하였으며, 내가 찾아갔을 때에도 가을 전시회에 출품할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한반도 지도 모양에 나비 백 마리를 채워가면서, 고모는 그 그림이 내 몫이라고 말했다. 고모는 그림에 몰두하다가 힘들면 침대에 누워 쉬곤 했는데, 짬짬이 살림살이까지 꾸려가고 계셨다. 자기가 움직여 내게 조석을 지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내 방문을 기뻐하셨다.

고모는 나의 성장기에 많은 영향을 준 분이다. 고모의 입장에서 볼 때도 나는 다른 여느 조카들과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갖는 존재였다.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

이 말은 철이 들면서부터 고모에게서 여러 차례 들은 말이다. 실제로 내가 어떤 작은 시비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고모는 앞뒤 가리지 않고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서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간섭에 난감해 했다. 의협심이 강한 고모는 일찍 부모를 잃은 친청 첫조카인 나를 자기 자식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 같았다. 자기 자식들에게도 내게는 무조건 복종하고 따르도록 길들여 놓아서, 함께 늙어가는 지금까지도 사촌 동생들은 나를 어려워하고 극진히 대한다.

고모는 손재주가 많아서 바느질도 잘하고 자수에도 능했다. 수복 후에 박내현 화백을 찾아가 자수본을 받아다가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양재를 배워 어릴 적부터 내게 멋진 양복을 만들어 입혔으며, 여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교복도 만들어 입혔다. 그 영향으로 훗날 나도 양재를 배워 글을 쓰기 시작한 오십대 중반까지 가족들의 옷을 지어 입히게 되었다.

만남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고모는 내게 주어보낼 선물을 챙겨 내놓기 시작했다. 내가 할머니한테서 물려받아 보관하고 있는 백항아리와 한 벌이라는 복수박만한 작은 백항아리, 자세히 살펴보니 여러 조각으로 깨어진 것을 접착제로 붙인 것이었다. 그 항아리 안에는 고모가 시집갈 때 가져간 혼수품이었다는 실에 꿰인 색색의 골무가 일곱 개, 이불 홑청 꿰매는 굵은 실 두 타래와 명주실 뭉치, 언제 쓰던건지 알 수 없는 서양 자수를 놓는 오색 실 뭉치, 그리고 처녀 때 달았다는 홍색 꽃댕기가 들어 있었다. 고모는 항아리를 살피는 내 눈치를 보며 불안해 했다. 나는 고모를 안심시키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고모, 항아리는 짝 맞춰서 장식장 안에 간수하구요. 실과 댕기는 칠십 년이 넘은 거니까 사료적 가치가 있겠네요. 기회 봐서 민속박물관이나 단국대 석주선 박물관에 기증하도록 할께요.”

“아이구 얘, 무슨 박물관까지…….”

내 말에 용기를 얻은 듯 고모는 침대 밑에서 쟉크 보따리와 단추 보따리를 꺼내놓았다. 도대체 제품 바느질이라도 하실 요량이었나, 하고 놀라며 인사로 몇 개 가져가려고 단추를 고르기 시작했다.

“얘, 많이 가져가라. 다 가져가도 괜찮아. 나 죽으면 쟤가 다 버릴 건데 뭘.”

고모는 시큰둥한 얼굴로 곁에 앉아 있는 손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쟉크와 단추를 골라내서 커다란 봉투에 가득 담으며 기뻐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가다가 태평양에 던져버린들 어떠랴, 죽음과 마주 선 고모한테 마지막 효도를 하자, 하는 심정이었다. 사실 내가 바느질 손놓은 지가 십수 년이 넘었고, 평생 바느질하며 사들인 부속품과 옷감이 서랍으로 몇 갠데……. 나 역시 자식들이 바느질을 하지 않아 물려줄 사람도 없는 판에 이게 웬일인가?

그러나 내 태도에 마음을 놓은 듯 고모는 옷감을 한아름 내다가 내 앞에 쌓아놓으며 속바지랑 잠옷을 해 입으면 좋을 거라고 권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또 끄덕였다. 그러자 어디서 얻어다 놓았는지 기저귀를 끼워넣을 수 있는 환자용 팬티와 기저귀까지 내게 밀어놓더니, 나중에는 한 번도 안 쓴 풀솜 이불이라며 병풍 뒤에서 이불 보따리까지 꺼내다 내게 안겨주었다. 결국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고모, 이불은 정말 못 가져가요.”

고모, 가는 데는 순서 없어요. 나도 이제 칠십을 바라보는데… 라는 말이 그 말에 덧붙여 쏟아져 나올 뻔했으나 용케 참아냈다.

“집에 이민 가방 안 쓰는 거 있으니까 다 가져갈 수 있어.”

아쉬워하는 고모 앞에서 이불 보따리만은 끝내 사양했다. 사십 년간이나 이사를 안 하고 사는 내 살림이라 우리 집도 이불을 버리려면 작은 트럭을 불러야 할 판인 것이다.

그 날, 고모의 선물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앨범을 꺼내놓으며 내가 원하는 사진을 모두 떼어가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고모는 또, 나 죽으면을 연발했다.

나는 천년 만년 살 것 같은 기분이 되어 고모의 앨범에서 내게 없는 사진들을 삼십 여 장이나 뜯어냈다. 내가 백날이 조금 지났을 무렵 서대문집 현관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조부모님, 부모님, 두 고모의 행복한 모습들, 이 가족에게 닥칠 앞날의 비극을 알 길 없는 사진 속 일곱 식구의 얼굴에는 자랑스럽고 행복한 미소가 넘치고 있었다. 그러고 죽은 남동생의 초등학교 입학 때 사진, 볼우물이 선명하게 보이는 다섯 살쯤 나보이는 내 사진, 갈래머리를 땋아내린 열일곱 살 무렵의 교복 차림 독사진, 유치원 졸업 사진, 남편과 먼 훗날 결혼하기로 약속한 날 영도 바닷가에서 찍은 스냅 사진, 당구를 치는, 베레모를 쓰고 덕수궁 큰 무쇠 화로 앞에 선, 한강의 뱃놀이에 간 듯 배 위에 선, 돌아가시기 전 대련의 사무실 창가에 걸터앉은 아버지의 사진들,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가슴 떨리게 한 것은 평안북도 철산군에 있는 고향집 사진이었다.

명함 두 개 크기의 이 사진은 구십 년 정도 되었다고 짐작되는 오래된 사진이었다. 사진은 집을 지은 직후 기념으로 찍은 것인 듯했다. 성채와 같은 집 모양이 또렷했고 기와골까지 선명히 드러나는 푸른색이 감도는 칼라 사진이었다.

고모가 그 집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구십 년 전 사진이란 말이 거짓은 아니다. 밤나무와 낙엽송이 우거졌던 야트막한 뒷산, 사진의 가운데를 가로지른 하얗고 긴 선은 집의 기단을 이루는 높직한 화강암 축대이다. 축대에는 본채와 사랑채와 러시아식 양관채로 오르는 높직한 층계가 세 개 있고, 그 층계 위에는 솟을대문이 있다. 축대 아래에 학교 운동장만한 잔디밭이 보이고 참외밭과 콩밭과 삼밭을 지나 개천과 그 너머 느펑으로 가는 길이 넓게 찍혀 있었다.

고향집은 할아버지가 직접 설계하여 지으셨고 중국의 쿠리들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다. 쿠리들은 가족을 데리고 와서 움막을 짓고 살며 일했다 한다. 그 시절 할아버지는, 배산임수의 복지에 집을 짓고 자손이 흥성할 것을 의심치 않으셨을 것이다.

내게 선물을 안겨준 고모는 대물림을 해준 만족감이 얼굴 가득 빛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잘 지닐게요.”

엉망이 된 앨범을 밀어놓고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행복하지 못 했던 고모의 결혼 생활, 오랜 친정살이의 고난 속에서 나를 친자식보다 더 사랑하고 기대를 품었던 고모의 마음, 고모는 어디까지나 고모이지 내 어머니일 수는 없다고 마음을 열지 못 하던 쌀쌀맞은 나, 이제 함께 노을진 황혼 속을 걸어가면서도 바짝 다가가 어루만져들이지 못 하고 밍밍한 미소만 던질 뿐인 내가 미웠다.

“가을에 전시회 끝나면 저 그림 부쳐줄게, 나 본 듯 두고 보아라.”

네, 하고 대답하면서도, 어디 고모 본 듯 할 게 한두 가지유, 하고 마음 속으로 쫑알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