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대우

                                                                                               朴在植

 어느 지방의 수필 단체에서 갖는 1박 2일의 세미나 행사에 참석하였는데, 접수를 보는 젊은 여류가 “원로 선생님은 면제”라면서 소정의 참가 회비를 받지 않았다. 게다가 주제 강사로 초빙된 J`교수의 예양으로 2인 1실이 마련인 숙소를 독방으로 배정받는 특혜까지 누렸다.

뜻하지 않은 원로 대우를 받은 나의 심사는 적이 착잡했다. 물론 고맙고 흐뭇한 마음이 잠시 앞섰던 것은 호의를 입은 사람의 인지상정이지만, 뒤이어 뭔가 격에 맞지 않는 대접을 받았을 때의 어색한 느낌과 점직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 것이다.

원로는 ‘사계斯界에 오래 종사하여 공로가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을 두고 일컫는 명칭이다. 원로가 되자면 의당 나이도 웬만큼 늙어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사계에서 활동한 경력이나 업적이 남다르게 중후하여 후진들이 우러러 귀감으로 삼는 인물이라야 할 터이다. 이런 가늠에서 볼 때 문인으로서의 나의 푼수가 원로로 대접받기에는 매우 점직한 노릇이다.

첫째 연공으로 따져도 40대 후반에야 늦깎이로 등단한 알량한 경력이니 정작 20대부터 문력文歷을 쌓아온 문단의 제제한 원로들에 견주어 고작 중견에도 못 미치는 연륜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남의 이목에 두드러진 문단 활동이나 후진들이 본으로 삼을 만한 작품 하나 남긴 것이 있느냐 하면 그런 실적도 전무할 뿐더러 일부 기성 수필가 외에는 이름조차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그러그러한 존재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문학청년과 같은 기분으로 문학에 뜻을 두고 글을 쓰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이런 나를 원로로 대접한다는 것은 아무리 새겨보아야 그저 ‘원체 늙었다’는 의미밖에는 값할 근거가 없다. 그래서 주최측은 먼 곳까지 찾아온 늙은이에게 여느 참가자와 같이 챙겨 받기가 거북살스러운 회비를 면제해 주고, 평소에 친교가 깊은 문우 J`교수는 초빙 강사용으로 특별히 배정되는 자신의 독방을 연상인 나에게 양보해 주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 심외의 호의를 입은 사람으로서는 되레 미안한 생각으로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회비라야 행사에 빠듯한 경비의 각출인데 그 중 면제자가 낸 구멍은 다른 참가자의 몫에 덧붙어 메워지거나 주최자의 손실로 돌아가게 마련이고, 또 분에 없는 독방을 차지한 것도 J교수의 희생적인 양보로 얻은 특전이 아닌가. 이 모든 작폐가 오로지 늙었다는 이유 하나만의 밑천에서 비롯하는 잉여가치의 착취 형태라고 생각하면 새삼 늙음에 대한 자괴지심이 슬그머니 머리를 쳐드는 것이다.

나는 서울에 가면 으레 지하철의 신세를 진다. 지옥 같은 지상의 번잡을 피해 땅 밑을 거침없이 누비는 교통수단이 여간 편리한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 대견한 것은 무엄하기 짝없는 우리 나라 대중교통 중에서 그래도 노인 대접이 깍듯한 곳이 지하철이기 때문이다. 백색의 무료 승차권만 받아 쥐면 여느 승객과는 달리 구간이나 거리는 괘념할 바가 없고, 따로 마련된 경로석에 다가가면 앉아 있던 젊은이가 얼른 일어서서 자리를 내어줄 줄 아는 곳이 지하철이다. 그러구러 내가 사랑하게 된 지하철에 명실이 상부하는 신세를 지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경로 적령 초엽의 한동안은 우정 우대의 혜택을 외면하고 지냈다. 그 무렵은 얼굴에 아직도 초로의 티가 가시지 않았던 때라 표를 얻을 때마다 일일이 주민증을 꺼내기가 민망스럽기도 했지만, 신로불심로身老不心老의 객기를 몇 푼의 차비와 바꾸고 싶지 않은 호사 심리가 작용한 것만도 사실이었다. 한 번은 시험삼아 창구에 맨손을 내밀어 보았다. 그러자 매표원은 얼굴은 힐끗 살피고 나서 경로증을 보여 달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내가 그렇게 젊어 보이오?” 하고는 주민증 대신 돈을 꺼내 준 적이 있다. 물론 차 안에 들어서도 경로석 가까이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사정이 사뭇 달라졌다. 머리에 검은 물감까지 들였는데도 매표소 앞에 다가서기 만하면 별로 거들떠보지도 않고 백표가 자동기에서 나오듯 밀쳐져 나온다. 그럴 때마다 내가 의당한 권리를 향유한다는 떳떳함보다 구걸하는 약자의 비굴함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차 안에 들면 경로석이 아닌데도 자리를 양보하는 기특한 젊은이를 전보다는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양보를 받고 앉은 자리가 짜장 편할 수만은 없다. 남의 자리를 생짜로 빼앗았다는 자괴심 때문이다. 경로석과는 달리 차실의 중앙 부분에 있는 일반석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자리의 임자이다. 그래서 설혹 서서 가는 노인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통상의 경우이다. 그런데 그 자리를 경로의 명분으로 빼앗아 앉는다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마지못해 자리를 내어주고 서서 가는 당사자 앞에서 미운 오리 새끼 꼴을 하고 앉아 있는 마음이 태연할 수가 없다. 공짜로 타는 주제에 자리까지 빼앗아 앉았으니 얼마나 볼썽사나웠겠는가. 수필가의 모임에서 원로 대우를 받는 나의 꼴이 꼭 이런 모양새가 아니었는가 싶다.

통계청의 조사에 의하면 65세 이상의 노령자 중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돈버는 일을 해본 사람은 전체 노인의 25%에 불과하다고 한다. 노인의 경제적 활동력의 나약함을 말해 주는 통계이다. 옛 같으면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웬만한 일도 효율성이 훨씬 높은 기계와 젊은 인력이 도맡아서 하는 세상인지라 경험과 미립이 밑천일 뿐인 노쇠한 노동력이 발붙일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 하릴없는 노령자가 미구에 전체 인구의 10%에 이르고 20년 뒤에는 20%를 넘을 추세라고 하여 경로 문제와 맞물리는 복지 대책 때문에 나라 살림이 지레 주름살을 잡고 있다는 소식이다.

문단의 사정도 이와 비슷한 형국이 아닌가 싶다. 날로 불어나는 등단 신인들의 대세에 밀려 무가내하 원로(?)의 멍에를 쓰고 궁싯거릴 노령의문인 인구가 늘 수밖에는 없다. 컴퓨터의 막강한 제작 시스템을 이용하는 활발한 작품 활동과 질적으로도 원로의 수준을 능가할 만한 별들이 새록새록 뜨고 있는 판국에서 안고수비眼高手卑의 노쇠한 문력이 맥을 출 수가 없는 법이다. 당연하고도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노문사老文士의 마음은 황량할밖에 없다.

일찍이 퇴역하는 노장군 맥아더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고 했는데 그도 별수 없이 죽고 만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