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季 評 ─

(본지 2002년 여름호)

 예민한 감수성

                                                                                                   김종완

 천생, 작가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타고난 감수성 때문이다.

키가 작아 운동장 조회 때 맨 앞에 섰던 초등학교 2학년 학생(그때는 보통학교였을 것이다)이 숨을 쉴 때마다 나풀거리는 처녀 담임 선생님의 ‘여며진 저고리 앞가슴’을 보면서 ‘가슴이 콩닥거리는 것에’ 스스로 놀라고 ‘얼굴까지 달아올라 숨을 길게 내쉬곤’ 했다니(유경환의 ‘투명한 행복감’)… 이것은 조숙早熟이 아니라 예민한 감수성이다. 그가 작가(시인)가 되지 않았다면 그 예민한 감수성을 어찌 했을 것인가. 그는 천생이 작가다.

 

변해명의 ‘나도바람꽃’

작가가 알고 있는 그 많은 풀꽃에 기가 죽었다. 필자는 부끄럽게도 들에 나가 나무와 새들과 들꽃을 볼 때마다 매번 동행한 사람에게 이름을 물어보지만 가르쳐 준 그 자리에서 까먹고 항상 이름 모를 들꽃과 나무와 산새일 수밖에 없는 무식함을 면하지 못하는 형편으로는 감탄치 않을 수 없는 지식의 양이다.

어렸을 적 작자는 제비꽃으로 반지를 만들어 열 손가락에 끼고 공중으로 뻗쳐 올려 두 손을 돌리면 그 반지들은 반짝반짝 빛나고 그러면 시골 소녀의 가냘픈 손은 보석으로 치장한 공주의 손이 되었다.

그 소녀는 외할머니의 무덤 가에 고개 숙이고 땅만 보는 할미꽃이 불쌍해서 꽃 허리를 세워 하늘을 보게 했다. 그 할미꽃은 할머니의 현현이었으니까. 그리고 해소가 심했던 할머니의 기침 소리를 들어보려고 무덤에 귀를 대어 보기도 했었다. 그 감수성 예민한 소녀가 자라 ‘나도바람꽃’이라는 꽃 이야기를 썼다.

 

꽃보다 이름이 더 아름다운 ‘너도바람꽃’과 ‘나도바람꽃’이 있다. 미나리아제비과의 꽃으로 산그늘에서 피어나는 꽃인데, 세상에 형태조차 없는 바람을 닮겠다고 ‘나도바람꽃’, ‘너도바람꽃’이다.                      ─ P. 15

 

그런데 꽃이면서 꽃이 아닌 바람을 닮겠다고 ‘나도바람꽃’, ‘너도바람꽃’이라고 불리어지기를 바라는 꽃이 있다니.

─ P. 16

 

누가 맨 처음 이런 시적인 이름을 지었을까? 너도밤나무가 닮고자 하는 대상은 밤나무이다. 그렇다면 ‘나도 바람꽃’, ‘너도바람꽃’이 닮고자 하는 선망의 대상은 바람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바람꽃이 있는가? 바람꽃이란 실체가 없다면 그 선망의 대상은 바람이다. 나도 너도 ‘바람이 되고자 하는 꽃’이다. ‘꽃보다 생명이 더 짧은 바람으로, 순간에 스치는 무형의 존재로 써 보려는 꽃의 의지는’ 이미 꽃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것은 존재이기를 포기하고 한낱 흐름으로 남고자 하는, 아니 남는 것이 아니라 스러져 사라지고자 하는 존재 부정의 꽃이다.

 

나는 이 봄, 산야에 피어나는 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꽃들 속에 서서 나도 한 포기 풀꽃이 되어 본다. 어떤 꽃이 되어 볼까?

─ ‘나도바람꽃’ P. 16(글의 마지막 부문)

 

바람꽃이 되고자 하는 이 작자는 생을 끝없이 긍정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 다만 확실한 것은 미세한 감정의 흐름마저 감지하는 작자의 감수성이 이 작품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미연의 ‘꼬마가 신발주머니를 휘두른다’

‘꼬마가 신발주머니를 휘두른다’는 200자 원고지 5장도 되지 않는 짧은 글이다. 이미연은 등단 3년차의 신인답게 실험을 하고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독자에게 보여줄 뿐 과감하게 설명을 생략하는 것이다.

 

아파트 입구 화단 앞에서 한 꼬마가 신발주머니를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신발주머니의 폭력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것은 키 작은 장미였다.

아이는 계속 어린 손으로 매섭게 이곳저곳을 때리고 있었다. 햇살은 따뜻하고 봄바람은 산뜻하게 불고 있는데, 순간 찬바람이 내 가슴 속을 휘 돌아갔다.

“꼬마야, 그만해라.”

불쑥 내가 한 말이었다. 아이가 고개는 아래로 향한 채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린 새 순을 어루만지며 계속한다.

“아직 어리지 않니. 많이 아프겠다. 너 같은 어린애를 큰형들이 때리면 아프지 않겠니.”

아이가 손짓을 멈추었다.

─ P. 112

 

아이가 왜 이렇게 폭력적으로 변했을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때 맞은편 아파트 입구에서 책가방을 멘 채 한 아이가 소리쳤다.

“○○야, 우리 집에 가서 놀다 가자.”

꼬마는 친구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안 돼. 나 지금 학원 가야 돼. 학원 숙제도 안 했어. 나 오늘 놀 시간이 없어”라고 외치듯이 말했다.

─ 중략 ─

장미는 가지가 하나 부러졌다. 부러진 것이 장미뿐이랴.

─ P. 113

 

필자가 여기에서 보는 것은 공식화된 감수성이다. 젊은 여자가 밤에 출근하면 모두 유흥업소에 근무한다는 식이다. 놀 시간도 없이 학원으로 내쫓기는 아이들이 정서에 상처를 입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이 돌발적인 행동의 원인이 모두 그 때문이라는 단호한 단정은, 단호한 그만큼 더 큰 위험이 내포된 것이 아닐까. 상처입은 만큼 보상심리에서 더욱 생명에 애착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유아의 의외의 폭력성은 인간이 원초적으로 갖고 태어난 동물성일 수도 있는 것이고.

감수성이 공식화 될 때 문학 또한 유연성을 상실하고 형해形骸화 되고 만다. 시도는 좋았으나 과정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최민자의 ‘그리고 싶은 그림’

최민자의 글을 볼 때마다 그녀만큼 수필이란 장르에 어울리는 작가도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한다. 그녀의 글은 산뜻산뜻 부는 봄바람이다.

작자는 박물관에서 빗살무늬토기를 보면서 누가 맨 처음 질박한 흙 그릇에 무늬를 넣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왜 꽃이나 새, 하늘과 구름을 그리지 않고 어슷한 줄무늬를 아로새겼을까.’

 

누군가 날카로운 뼈 바늘 같은 걸로 그릇 아가리에 첫 획을 긋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감격하여 가슴이 뛴다. 그는 어쩌면 인류 최초의 추상화가였을지 모른다.

─ P. 33

 

미술사학자 보링거의 해석을 인용한다. 인간의 추상 충동은 인간 내면과 외부 환경과의 부조화에서 오는 불안심리에서 출발한다는 것이고, 신석기 토기의 빗살무늬를 ‘공간에 대한 공포’에서 그 발생 기원을 찾는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인간과 외계 현상 사이가 비교적 행복한 친화 관계일 때는 사실주의가, 변화와 불안이 많은 시기엔 추상주의가 유행했다 하니, 20세기 이후의 추상적인 흐름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 듯도 싶다.

─ P. 33

 

작자는 신석기인이 ‘공간의 공포’ 때문에 추상의 세계를 살았다면 오늘날을 사는 사람은 ‘시간의 공포’ 때문에 추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소위 잘 나간다는 사람일수록 일정이 꽉 짜여 한가할 틈이 없다. 이동전화를 옆에 차고 이동수단을 바꿔가며 도시라는 사냥터에서 유목민처럼 살아간다. 돈과 권력, 지식과 정보, 사랑과 쾌락 ─ 원하는 사냥감은 제각기 달라도 무엇에 쫓기듯 무엇을 좇으며 낮도깨비처럼 밖으로 떠돈다.

─ 중략 ─

박물관 전시실을 기웃거리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일도 내 일상의 빗금긋기에 다름 아니다. 빈 시간, 빈 가슴을 채워두기 위하여 남들처럼 유행처럼 빗금을 긋는다.

─ 중략 ─

모호하다. 나조차 내 그림을 알 수 없다. 이것들이 정녕 내가 그리고픈 그림은 아니다. 빗살무늬 대신 조선 백자의 넉넉함을, 동양화의 여백을 그리고 싶다.

 ─ P 34∼35

 

여기에서 작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달에 첫 발자국을 낸 암스트롱만큼이나 위대한 손자국’인 빗살무늬는 불안한 일상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어버린 빗금긋기로 전략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점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작자는 악어가 먹이감을 놓고 하늘을 향해 우짖는 것처럼 빗살에서 풍기는 그 불안의 냄새에 대하여 앞에서 더 크게 울었어야 했다. 빗살의 의미를 계속해서 살리기 위해서는, 아니 더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슬픔의 절정에서 어쩔 수 없이 빗살의 추상의 의미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명히 밝혔어야 했다.

 

이제는 좀 비워두고 싶다. 촌스럽고 한물 간 유행이라도 꽃과 새, 하늘과 구름을 그리고 싶다. 텅 빈 하늘에 노을 한 자락, 꽃향기를 그리워하는 새의 노래. 그 넉넉한 여백을 그리고 싶다.

─ P 35

 

작자는 추상세계의 불안에서 구상세계의 안온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문학은 이미 그 세계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싶은 그림’은 이 계절에 미적으로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의 하나임을 그 누가 부정할 것인가. 이 글은 충분히 ‘꽃향기 그리워하는 새의 노래’가 되었다.

 

염정임의 ‘요술장갑’

필자는 염정임의 글은 ‘지성에 바탕을 둔 도시의 감수성’에서 나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요술장갑’은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글의 골격은 의외로 간단하다.

지하철에서 여자가 요술장갑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잡상인을 단속하는 두 명의 순찰대원이 우리 객차로 건너오는 것이 아닌가. 작자는 혹시 그 여자가 잡혀갈까 봐 마음을 졸이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들은 그 여자 옆을 지나면서 슬쩍 미소를 짓고, 그 여자도 웃으면서 남동생에게라도 하듯 반말로 무슨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사라지자 그 여자는 다시 장갑을 팔기 시작했다.

이 간단한 골격을 풀어내는 염정임의 솜씨를 보자.

 

우리 집 서랍장에는 노란 플라스틱으로 된 손바닥 지압기 두 개가 있다. 언젠가 2호선을 탔을 때에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하나 샀다가, 남편도 같이 장수長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나를 더 샀는데, 둘 다 서랍 속에서 굴러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중략 ─

그러나 선풍기 커버, 미니 앨범, 바늘 쌈지들은 얼마나 유용하게 쓰는지 모른다.         

 ─ P 102

 

그녀는 단골 고객인 것이다. 지하철에 제 발로 찾아 온 덕분에 지압기를 사러 시내를 헤매지 않아도 되고, 남편의 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기회마저 생겼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들은 물건을 많이 팔고 못 팔고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어떻게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민첩하고 멋있게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승객들을 매료시키기 위해 한바탕 연설을 한 다음 사용법을 시연해 보이고, 지나가며 물건을 내밀고는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 마치 주연배우의 등장을 위해 무대를 비워주는 조연배우처럼 신속히 객차를 떠난다.

그들의 얼굴은 상품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으로 꽉 차 있고, 연설은 열정적이며 설득력이 있다. 그들은 승객들에게 강요하는 법이 없다. 승객들은 관객처럼 앉아서 끝까지 구경을 하든, 물건 하나를 사서 그들의 공연에 동참하든 각자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다. 비록 한두 사람의 지지자支持者밖에 없다 하더라고 그들은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아름다운 뒷모습으로 사라진다.

─ P 103

 

이제 지하철 잡상인은 훌륭한 공연 배우가 되었다. 물건을 파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정된 공연을 훌륭히 완수하는 것이 중요한, 떠날 때를 알고 아름다운 뒷모습으로 사라지는 예인인 것이다.

작자는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다. 기꺼이 초대된 공연에 함께 참여했다.

 

지하철의 잡상인들에게서 물건을 사는 심리의 이면에는 아마 금지된 행위를 할 때에 느끼는 은밀한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마치 한적한 동네에서 횡단보도가 아닌 곳을 슬쩍 건넌 후라든지, 길바닥에서 반짝이는 은빛 동전 하나를 주워서 호주머니에 넣은 후에 느끼는 그런 즐거움 말이다. 거기에다 실패한 사업가를 돕는다는 자부심까지 얹어주니 그 누구인들 상인을 외면하랴.

─ P 103

 

우리는 지하철에서 장사들로부터 물건을 사는 순간 공범자끼리 가지는 친밀감을 느낀다. 순찰대가 오기 전에 재빨리 돈을 주고 물건을 건네 받으면서 게임의 같은 편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 P 104

 

그러나 이제 게임은 끝났다. 게임에 재미를 부여했던 위기란 애당초 조작된 것이었다. ‘그 여자는 게임의 법칙을 어기고 적과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술장갑은 잡상인이 파는 품목만이 아니라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이기도 했던 것이다.

작자의 시선은 이 사회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공생의 부패 사슬을 다시 읊조리며 글을 쓸쓸히 끝맺고 있었다.

염정임은 단순한 글의 골격에 매끈한 살을 입혔다. 그 능력이 어찌 하루 아침에 얻어졌겠는가. 훌륭한 글이 되기 위해서는 감수성 또한 갈고 닦아야 한다는 실증이 ‘요술장갑’이다.

 

글이란 감동이 있어야 한다. 감수성이란 감동을 잉태시킬 생명의 씨앗이다. 그러므로 감수성이 테크닉으로 치장만 되어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다 드러내는 것이다. 드러냄이란 진솔한 고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냄으로써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여 본질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실의 힘보다 더 강한 힘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김종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95년). <수필과 비평> 편집위원.

저서 『수필 들여다보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