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돈수(頓悟頓修)

                                                                                                 金奎鍊

 예말 어느 가을날.

한 젊은 관원이 나옹선사懶翁禪師를 만나 보려고 오대산 깊숙한 수림 속 암자를 찾아들었다.

선사는 노쇠한 육신을 육환장六環杖에 의지하며 법당 뜨락을 서성거리고 있다. 귀한 손이 올 것을 이미 알고나 있듯이.

드디어 그 관원이 턱 앞에 다가서자, 선사는 비로소 눈빛을 땅 위에 깔며 예를 갖춘다.

“빈도는 나옹이라 합니다. 관원께서 어쩐 일로 예까지 오셨습니까?”

“나는 장차 고려국의 대들보가 되야 할 사람이요. 듣건대 스님께선 선지식善知識이란 명성이 자자해서 좌우명 하나 얻으려고 왔습니다. 나는 일찍이 대과에 장원 급제 한 바 있으니 이에 걸맞은 것을 일러주시오.”

자못 오만하고 방자하기 그지없다. 따지고 보면 그럴 법도 하다고 할까. 그는 명문가 출생인데다 두뇌가 명석해서 어린 나이에 벌써 유, 불, 선에 통달했다. 게다가 고려국의 군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최영 장군의 손녀와 혼인했는가 하면, 약관에 높은 관직에 올랐으니 말이다.

갑자기 한 줄기 산바람이 산허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단풍 잎새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선사는 미소를 지으며,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생봉행衆生奉行, 이 화두를 평생 가슴 속에 지니시지요.”

“핫핫하… 온갖 죄악 저질지 말고 착한 일 많이 하라. 이 따위가 무슨 좌우명이라 말입니까. 그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요. 나에겐 학문적으로 아주 깊고 심오한 뜻을 가진 그런 것을 말씀해 주셔야지요.”

선사는 가을 하늘을 가르고 날으는 기러기 떼를 한참 응시하다 말고 무겁게 입을 뗀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팔십 노인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자면 어렵습니다. 관원께서도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을 아시지요. 한 차원 높이면 백견이불여일각百見而不如一覺이지요. 또 한 차원 높이면 백각이불여일행 百覺而不如一行이 됩니다.”

관원은 소맷자락에 떨어진 단풍잎 한 잎을 긴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백 번 듣기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고, 백 번 보기보다 한 번 깨치는 게 낫고, 백 번 깨치기보다 한 번 실천하는 게 낫다. 옳은 말씀이다. 다 아는 사실이라도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는가.”

관원은 이윽고 머리를 깊이 숙여 정중히 인사를 드리며,

“큰스님 고맙습니다. 뜻 깊은 좌우명을 가슴 속에 비문처럼 새겨두고 살겠습니다.”

먼 데서 산짐승 소리가 산중의 적막을 간간이 깨뜨리고 있다.

나옹선사는 젊은 관원을 처소로 안내해서 차를 대접한다. 관원 앞에 내놓은 찻잔에 차를 따르는데 나옹은 먼 산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긴 듯 차를 계속 들이붓는다. 작은 찻잔에 찻물이 넘치고 넘쳐 방바닥이 엉망이 된다. 관원은 스님의 손을 공손히 붙잡고 말한다.

“큰스님 뭣을 그렇게 보시옵니까. 찻물이 넘쳐 흘러 지금 방바닥이 흥건히 젖어듭니다.”

나옹선사는 근엄한 표정으로 젊은 관원을 쏘아보며,

“관원께선 어찌하여 작은 찻잔에 물이 넘쳐 흘러 방바닥이 엉망이 되는 것은 볼 줄 알면서 작은 머리통에 지식만 넘치고 넘쳐 인품이 엉망이 되는 것은 왜 볼 줄 모르시는가요.”

관원은 깜짝 놀랐다. 암흑천지를 깨뜨려 부수는 뇌성벽력 같은 소리에. 마침내 그는 한 소식 크게 얻었다. 지식도 중하지만 인품은 더욱 소중한 것을. 감격과 환희에 겨워 자신도 모르게 나옹선사 앞에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엎드려 큰절을 삼 배 올렸다. 그리고,

“큰스님께선 저를 미망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 은혜 백골난망하옵니다. 부디 오래 오래 강령하셔서 어리석은 많은 중생을 제도해 주옵소서.”

하직인사를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관원은 평소처럼 허리를 쭉 펴고 방을 걸어 나오다가 암자의 낮은 문틀에 이마가 탁 부딪쳤다.

“아얏” 소리를 내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뒷전에 앉아 계시던 나옹선사가 조용히 법문하듯 말씀하신다.

“매사에 감사하듯 머리를 숙여야 부딪치지 않는 법이지요.”

관원은 또 눈이 번쩍 뜨이게 한 소식 얻은 셈이다. 여태껏 아는 게 좀 있다고 벼슬이 높다고 안하무인으로 온 나라를 휘젓고 다닌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다음 순간 그는 재승박덕才勝薄德에서 재덕겸비才德兼備의 새 사람으로 확 바뀌었다.

이럴 때 돈오돈수頓悟頓修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훗날 조선조 세종 때 이르러 청백리로 경세가로 명정승으로 큰 족적을 남기게 됐다. 어쩌면 그가 곧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일지도 모른다.

산까치 떼가 머리 위에서 요란하게 지저귄다. 나는 고려 말의 오대산을 방황하다 문득 몽환에서 깨어났다. 마른 잎새들이 연신 뚝뚝 듣고 있다. 학산鶴山의 가을 숲이 제법 좋아서 노송 밑에 앉아 좌망坐忘을 즐긴다는 게 그만 엉뚱한 환상에 빠졌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