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하길남

 택시를 잡기 위해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내 앞으로 여든은 족히 넘었을 성싶은 노인이 휠체어를 탄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손아귀에 힘이 있을 리 없는 그가 바퀴를 굴리느라 안간힘을 써보지만 번번이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나는 이분이 무슨 긴한 볼일이 있어 이렇듯 혼자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물어보았다.

“어르신께서 어디를 갔다오십니까?” 하고 물으니, “교회에 갔다오는 길”이라면서 가쁜 숨을 내쉰다. 나는 혼잣말처럼 “예배를 마치고 이 길로 오는 신자도 없지 않을 텐데 노인을 도와줄 사람이 그렇게 없었던가. 쯧쯧” 하고 중얼거렸다.

하느님은 ‘어느 누구에게 한 적선도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교회에 앉아서 입으로 기도를 올리는 것보다 온몸을 움직여서 힘들고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이 더 값진 일이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휠체어를 밀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버스 정류소 한 구간을 밀고 가다 보니 온몸에 땀이 흐르고 힘이 빠졌다. “집이 어딥니까?” 하고 물으니 무어라고 대답은 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길 가는 학생을 불러 이 노인을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하면서 돈 몇 푼을 그의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 노인은 나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소매로 눈시울을 훔치는 것이었다.

그때 나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과연 남의 눈에서 눈물을 볼 만큼 감동적인 일을 몇 번이나 해왔던가. 내 부모에게 진정 후회 없는 효도를 했던가. 내가 오늘 이렇게 노인을 도운 것도 평소에 못다 한 부모에 대한 무의식적인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모를 일이 아닌가.

소원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고 프로이드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했다. 못 이룬 소원은 꿈에서라도 기어코 이루고 만다고 말이다.

6·25 때 병역을 기피한 채 숨어 사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전시에 병역기피자가 군경에 검거되면 총살형을 면치 못하게 될는지 모른다는 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오른손 둘째 손가락을 잘라버리려고 했다. 잡혀서 죽느니보다 백 번 낫지 않느냐고 마음 속으로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뿐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 후 전쟁이 끝나고 그 청년은 결혼을 했다. 첫 아들을 낳았는데 오른 손 둘째 손가락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의 무의식적 바람이 자식을 통해 이루어진 셈이라 하겠다.

그렇다. 형상은 마음이 구체화된 것인데, 새삼 울고불고 지지고 볶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경영법鏡映法이라는 것이 있다. 글자 그대로 거울에 비추어 보여준다는 말이다. 예컨대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이 식사시간에 좀 늦겠어요 라고 전화라고 해주었으면 참으로 좋았을 텐데” 하고 말했다면, 아내는 남편의 입장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 환기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당신은 늘 자기중심적이야” 하고 상을 찌푸린다면 문제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행위규제를 인격규제까지 확대한다면 곤란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상 우리는 이 법칙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마냥 으르렁거리면서 살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나는 그들이 가고 있을 길을 감히 똑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마음만 졸이고 있다. 행여 그 학생이 휠체어를 밀다가 그만 줄행랑을 쳤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또 실없이 ‘남을 의심한 죄’를 짓는 꼴이 될 것이 아닌가.

이럴 때는 기도밖에 더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그 노인으로부터 한 수 배우게 되나니, ‘명월이 만공산滿空山’ 할 때는 어차피 한 걸음 쉬어갈 수밖에 없으리라.

 

 

 

하길남

<수필문학>으로 등단(78년). 수필가. 평론가. 마산시 문화상 수상.

수필집 『닮고 싶은 유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