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떠난 자리

                                                                                                    정원모

 마음이 스산하다. 귀뚜라미 소리가 아침 저녁 들리는 철 탓이 아니다. 다시 만난 친구를 잃은 허전함이 가슴을 헤집고 있는 까닭이다.

이 아파트로 이사온 지 얼마 안 되는 지난해 봄, 어느 아침에 집 건너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귀를 의심했다. 여느 때에 듣지 못하던 소리지만 어릴 적에 듣던 귀익은 것임이 분명하다. 경비원에게 저 새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대답이 시답지 않았다. ‘나이 많은 당신이 모르는데 내가 어찌 알겠소’ 하는 얼굴로 일어선다.

여름이 되면서 애절한 울음소리는 전보다 자주 들렸다. 울고 있는 매미가 미웠다. 자지러진 그 소리가 회포를 풀고 있는 옛 친구와의 만남을 헤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새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음이 참으로 답답했다. 어디 말이 되는가, 친구라 하면서 이름을 모르다니. 아주 친하던 옛 벗을 만났는데 이름이 가물가물한 그런 안타까움……. 다만 이 일을 그가 알지 못할 터이니 그게 다행이었다.

광릉光陵에 갔다. 거기 산림박물관에는 녹음한 새 소리가 들리면 그 모습과 이름표에 불이 켜지는 장치가 있다. 그런데 모든 새 소리를 여러 번 들었으나 집에서 듣던 소리의 주인을 알아낼 재주가 없었다. 장마 비와 원고 교정 일로 한동안 숲에서 오는 소리와 멀어진 때문인 듯싶었다.

같은 녹음 테이프를 구할 수 있는지 직원에게 물었다. 숲의 새 소리를 집에서 들으며 테이프에 녹음된 소리로 새 이름을 가려내자는 것이다. 직원은 파는 곳이 없다 하며 그것을 가지고 있는 교수 이름을 일러주고 그와 의논하기를 권했다.

다른 일에 파묻혀 미뤄놓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리고 쉽게 문제가 풀렸다. 전화 회사의 생활정보 서비스에서 그 새 소리를 들은 것이다. ‘뻐꾸기’였다. 생각해 보니 지하철 전동차의 안내 방송에서도 들은 것 같고, 누구네 벽걸이 시계에서도 울리는 소리가 아닌가. 내 아둔함을 누가 알면 어쩌나, 쓴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친구 이름을 되찾은 기쁨으로 나사 빠진 남자의 마음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응어리 풀린 자리엔 애틋한 마음이 움트기 시작했다. 옛 정의 새 순은 새록 자라고 갈수록 깊어졌다. 아침마다 친구 인사를 아니 받으면 내 하루는 시작되지 않았다. 그는 추억이 사려진 타래를 조금씩 풀어헤쳐 나를 어린 시절로 이끌었다. 산딸기 송이가 풍성한 골짜기를 안다고 속삭였다. 때로는 굵은 칡뿌리를 쉽게 캘 수 있는 응달을 귀띔해 주었다.

뻐꾸기 얼굴은 둘이다.

어미는 개개비 따위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둥지 임자는 남의 알인 줄 모르고 품어서 부화하고 거두어 먹인다. 그뿐인가. 어린 뻐꾸기는 부화하지 아니한 개개비의 알을 밖으로 떨어뜨려 버린다. 입은 은덕을 악으로 갚는 것이다.

영어에서 행실이 부정한 여자의 남편을 뻐꾸기 울음소리를 따라 ‘커컬드(cuckold)’라 부른다 한다. 영국 작가 제프리 초사가 쓴 『새들의 의회』에 나오는 그리스 신화가 그 유래인데, 이를테면 ‘오쟁이를 진’ 남편이란 뜻이다.

이처럼 뻐꾸기는 혐오스러운 데가 있으나 우리가 일상 느끼는 정서는 사뭇 다르다. 세상의 온갖 한이 다 녹아 있는 듯한 처량하고 구슬픈 울음소리로 여러 문학 작품의 글감이 되어 왔다.

사람 가슴을 파고드는 그 소리, 거기에는 한을 품고 죽은 사람의 넋이 뻐꾸기라는 전설이 서려 있다.

산감자를 먹고 살던 형제의 슬픈 이야기. 동생은 늘 큰 감자를 골라 앞 못 보는 형에게 주고 자기는 작은 것을 먹었다. 형은 도리어 저에게 찌꺼기만 주는 줄 오해하고 있다가 마침내 동생을 해쳤다. 뒤에 잘못을 알고 비통 끝에 죽어 뻐꾸기가 되었다. 산감자가 여무는 6월이 오면 애꿎게 이승 인연을 놓쳐버린 동생에게 감자를 배불리 먹여 주겠다는 뜻으로 ‘포복飽腹 포복’ 운다고 한다.

그가 강남으로 떠난 지 몇 달, 난데없는 소문이 퍼졌다. 동네 옆의 산자락을 파헤치고 큰 길을 낸다는 것이다. 산 너머에 주택단지를 새로 만들기 위해서라 했다. 이미 나무를 여러 그루 잘랐다는 말도 들렸다. 도시계획이나 아파트 분양 때의 도면에 없던 사건이다. 조용한 곳을 찾아 외진 데로 온 사람들이 가만 있을 리가 있나. 인심이 들끓었다. 걸핏하면 머리띠 두르고 하늘 보고 주먹질하는 것을 마뜩찮게 여기는 나지만 아내가 시위 집회에 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모진 추위를 무릅쓰고 벌어진 거센 반대 운동으로 관청에서 길을 내는 계획을 거두었다 한다. 구름은 걷히고 숲은 동네 보물처럼 보이게 되었다.

해가 바뀌어 남쪽에서 겨울을 난 친구가 돌아왔다. 모습은 안 보이지만 다정한 인사말을 들었다. 그는 숲 바람에 실려 보내는 울음소리로 나를 명상에 잠기게 했다.

뜻밖에 7월 어느 날, 녹지 훼손을 반대한다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이상했다. 산을 허무는 공사가 시작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지난번 불씨가 살아 있었나…….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홀연히 떠났단 말인가. 문헌을 찾으니 뻐꾸기는 5월에 와서 가을에 간다고 되어 있다. 그가 현수막을 본 것 같았다. 조여오는 사람의 손아귀를 본능으로 느끼고 살고 있는 터전의 앞날을 헤아렸을 것이다.

본디 숲의 임자는 사람인가……. 나무가 뿌리박은 그 곳에는 새뿐 아니라 벌레도 있고, 산 풀이며 버섯과 곰팡이가 터잡고 함께 산다. 저마다 생태계를 지탱하는 구실이 있어 사람의 입김이 닿지 않던 예로부터 살아온 것이다. 숲에 대하여 그들에게 아무 권리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가뭇없이 사라진 친구를 그린다. 숲 바람이 인다. 그 소리가 황량한 바닷가의 겨울 바람 소리로 들려온다.

 

 

 

정원모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94년).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볼록렌즈 밖의 세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