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고양이를 얘기함

                                                                                                   김채영

 동생네 도둑고양이가 산달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동생네 도둑고양이, 엄밀히 따지면 어법에 맞지 않는다. 동생이 음식점을 인수받을 때 그 곳에서 터를 잡아 살던 고양이가 엉겁결에 딸려 온 것이다. 그때부터 음식 쓰레기로 고양이를 챙겼으니 반은 사육하는 셈이었다. 얼마 전까지 그 집 주변에 쥐 떼들이 출몰했다. 동생은 쥐에게 쫓겼고, 그녀가 거두는 고양이가 쥐를 쫓는 치열한 생존 다툼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 곳엔 동생과 쥐, 고양이의 살벌한 공생의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동생네 가게에 처음 갔던 날, 대낮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아는 척했다. 내가 이 곳의 터줏대감이니 알고나 있으라는 언질이거나, 잘 지내보자는 맹랑한 프로포즈 같았다. 고양이는 한낮이면 음식점 뜰을 어슬렁거리며 제 집인 양 여유롭게 산보를 했고, 밤마다 바람에 홑이불이 날아가듯 월장을 하여 검은 장막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원정 사냥을 가는 듯했다. 집 주변에서 뭉그적거리던 고양이는 어느 날부터 창고인 콘테이너 박스 밑에 헌옷가지를 물고 와서 천연덕스럽게 기숙을 하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밤이슬을 밟던 고양이는 깜찍하게 사냥과 동시에 사랑도 챙겼나 보다. 콘테이너 박스 밑으로 부른 배를 헤집고 기어들어가는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동생은 바람난 딸을 나무라듯 한다.

“얘아, 사랑을 하려거든 집 있는 사내를 잡지 않고, 엄동설한에 이게 뭔 꼴이냐…….”

추위가 혹독한 계절에 어떻게 몸을 풀지, 많은 새끼를 무엇을 물어다 먹일지 그게 걱정인 모양이다.

요즘, 집 고양이라는 것은 희귀종이 되었다. 일단 고양이 하면 포괄적으로 자연스럽게 도둑이라는 올가미를 씌어놓고 정체성을 탐색해 보는 것이다. 고양이가 대접받던 시대가 있긴 했었다. 사람들은 소를 길들여 농사를 짓고, 닭을 키워 계란과 고기를 취했으며, 개를 길들여 재산을 지켰다. 농경문화가 번창한 시대가 도래하자, 뒤늦게 필요에 의해 선택된 것은 북아프리카산 들고양이란다. 마을로 내려온 고양이는 맹수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곡물 창고를 지키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거기다 본능을 살려 사냥까지 할 수 있으니 공인받은 도시의 유일한 마지막 전사가 된 것이다. 고양이에게 인간 세상의 귀속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문명은 항상 쓰임새에 따라 빛과 그림자의 위치를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놓는다. 건축 문화가 발전하자 사람들은 쥐들이 뚫을 수 없는 높은 담의 집을 지었고 아파트를 올렸다. 파수꾼의 일거리를 박탈당한 고양이는 노숙자처럼 황량한 거리를 떠도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가축 중에 길들여진 기간이 가장 짧은 고양이는 영민해서 수렵생활의 본능이 메모리 되어 있었나 보다. 이 바닥에서 평화스러운 삶을 영속할 수 없다는 것을 예견했는지 정글 속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오관이 뛰어나다. 부드러운 털에 숨긴 이빨과 발톱은 메스처럼 예리하다. 고양이는 지척에서 퇴화 과정을 거부한 채 집 동물과 야생의 두 얼굴로 존립하고 있다.

고양이의 몸은 과학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어두운 밤이면 한 점의 불빛까지 끌어모아 수정막의 반사를 이용해 재활용하는 특수한 기능으로 행동 반경을 확장해 나간다. 두 눈에 서치 라이트 같은 불빛을 밝히고 환풍기나 작은 구멍까지 숨어 있는 먹이를 찾아 사냥을 도모하는 것이다. 고양이의 콧수염은 촉수의 기능과 더불어 줄자의 역할을 한다. 미리 재어보고 먹이가 숨은 통로의 진입 여부를 결정하니 헛방을 딛는 일도 없다. 스프링같이 탄력이 붙은 근육질의 몸으로 고양이는 동네의 담장이나 미세한 골목, 지붕을 손금처럼 쥐고 논다.

외설 시비로 희대의 논란 대상이 되었던 마네의 그림 올랭피아─ 나부의 냉소적인 표정과 거침없는 포즈가 누드화의 본질인 관능에 찬물을 끼얹듯 침착한 기운으로 몰고간다. 여인의 하얀 속살과 검은 벽, 하녀의 검은 얼굴이 대비를 이루며 감흥 없는 무료한 침묵을 생산해 내고 있다. 그러나 여인의 발치에 그림자처럼 웅크리고 서 있는 검은 고양이를 발견하는 순간, 그 빛나는 눈을 통해 숨막히는 긴장의 파동을 감지하게 된다. 한낱 고양이에게 여인의 나신이 관음의 대상이 되어 송두리째 탐닉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도발적인 불길함은 사람들을 맑은 물에 한 방울 떨어져 일순 번지는 물감처럼 흥분하게 한다. 같은 애완용이라도 새와 강아지 같은 그림 속의 단순한 수식 장치가 아니라, 고양이가 시사하는 통제할 수 없는 악마적인 다양성 때문이었다. 올랭피아가 대중적인 물의를 일으킨 것은 고양이의 불타는 수정막을 통해서 나부를 만나는 낯설게 하기가 색다른 파격을 던져준 때문이었으리라.

흔히 주먹만한 얼굴을 가진 미인들을 ‘고양이과’라고 말한다. 고양이의 얼굴은 사진발이 잘 받는 스크린형이다. 은근히 관능을 풍기는 끝이 살짝 올라간 호수 같은 눈, 단정한 코, 오묘한 입술 등의 조화는 다소 건방지고 귀여운 여인의 얼굴 같다. 고음의 콧소리는 여인의 속삭임이거나 아기의 칭얼거림 같지 않은가. 고양이는 보드랍게 주인을 휘감으며 애첩 같은 능숙한 사교술로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장미의 가시를 닮아 실존을 위한 방어나 관리의 충분한 대비책을 염두에 두고 있다. 버려진 고양이들은 독립하여 사람과 가까운 거리에서 은밀히 숨어 자유롭게 잘 살아가고 있다.

‘금방울같이 호동그란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른다.’ ─ 이장희 시의 ‘봄은 고양이로소이다’의 한 구절이다. 고양이는 봄날의 부드러운 격정과 여름의 뜨거운 정염과 가을 하늘의 청신한 고요, 겨울의 눈보라 같은 냉정함을 골고루 지니고 있다. 고양이의 생체리듬은 사계절의 순환처럼 변화롭다. 세상의 지붕들은 고양이에게 능선으로 연결된 거대한 원시림의 모형이며, 그들이 개척한 유일한 신천지가 아니던가. 도둑고양이가 푸른 달이 휘영청 밝은 날, 온갖 지붕을 점유하며 요설스럽게 우는 것은 북아프리카의 광활한 대지로 돌아 갈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얼마 전부터 동생네 가게에는 쥐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도둑고양이까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우리 야옹이가 집 고양이를 만나서 잘 살고 있나봐” 하며 그녀는 은근히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고양이가 사라졌어도 그 곳에 쥐들이 얼씬도 안 한다는 사실이다. 살뜰하게 보살핌을 받았던 고양이가 동생에게 은혜를 갚은 것이리라. 그리고 밤이 이슥해지면 은근하게 경비를 돌러 한 번씩 고양이가 다녀갈 것이다. 모르긴 해도 고양이는 여전히 쥐를 쫓고 동생은 그리움으로 도둑고양이의 영상을 쫓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김채영

제11회 청구문학상 수필 부문 ‘남빛 치마의 추억’으로 대상 수상.

<수필공원>에 ‘마루가 있는 집’으로 추천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