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나들이

                                                                                                   서명희

 오월,

화사한 햇살 아래 나뭇잎이 연초록으로 신비롭다. 바람의 크기는 속살이 살짝 비치는 실크 옷 속으로 스며들 만큼 가늘고 유연하다. 이른 아침이지만 맨발에 전해지는 촉감이 싫지 않다. 겨우내 침침한 구석방에 갇힌 듯 옹색하던 기분이 창공을 날아오를 듯 자유로움으로 들뜬다.

이럴 땐 어디든 떠나야 할 것 같다. 야산의 오솔길을 걸어도 좋고 한적한 시골길을 천천히 달려도 좋을 듯하다. 선뜻 집을 나선다. 자동차에 시동을 걸면서 옆자리를 본다. 누군가 저 옆자리를 채워주었으면 좋을 듯싶다. 누가 좋을까? 내가 보라색 작은 오랑캐꽃에 감탄사를 뱉어 낼 때 잔잔한 미소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라도 좋겠고,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 따라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흥을 지닌 사람이라도 좋겠다. 연초록 맑은 오월의 잎들을 보면서 세상의 시름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옆자리를 내어주고 싶다.

촉촉이 젖은 눈을 가진 시인의 얼굴도 떠오르고, 나오길 잘했다고 즐거워할 친구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그러나 떠나야 할 이유를 설명해야 할 구차함이 번거로워진다. 혼자 떠나면서 조금 빈 듯한 공간에 오월의 화사함을 채워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든 반가워하는 산사를 알고 있으니 갈 곳을 걱정할 일도 없다. 차창을 열고 씻은 듯 깨끗한 신작로를 달린다.

강화도 고려산 백련사, 비켜가려면 아슬아슬한 산길 굽이 돌다보면 나 왔던 길이 발 아래 있고, 건너편 산등성이에 하얀 꽃 피워 물고 서 있는 고목의 의젓함이 다정하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저 꽃잎 꽃비로 날린다 해도 웃을 수 있는 너그러움이 배어 있다.

파릇이 잎들이 돋아난 진달래는 분홍 꽃잎으로 봄을 알리려 지청구를 해대던 지난날 모습을 자성하는 듯 단정히 정돈된 모습이다. 한참을 솔숲 터널로 달리다 보면 고목의 자태가 천년의 무게로 내려앉은 펑퍼짐한 지대에 절집 하나 오롯이 떠오른다. 고구려 장수왕 4년(서기 416년) 고려산을 답사하던 천축조사께서 이 산봉우리 오련지에서 오색 연꽃을 공중에 날려 그 연화들이 낙화한 곳마다 가람을 세웠다고 한다. 그 중에 흰색 연꽃이 떨어진 곳에 세웠다는 백련사이다.

오래된 절집답게 고목에 둘러싸인 극락전이 고색 창연하다. 비구니들만 기거하고 있는 정갈한 이 가람 여기가 바로 천상인가 싶다. 고려산 전체가 자비의 품속이니 굳이 법당에 들러 부처님을 뵙지 않아도 될 듯, 눈길 닿는 곳마다 맑고 신비로운 정경이 속세의 모습은 아니다. 산 아래 사는 이들이 산 위의 사람들의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더니 정녕 이 곳은 범속한 세계가 아니며 또한 속세의 경지를 벗어난 정토인 듯하다. 어느 곳이든 무릎 꿇어 합장해도 좋을 듯 신비로운 자연에 안긴 마음 가슴 가득 자비심이 젖어든다.

탐·진·치, 내 언제 그런 오욕에 젖은 적이 있었던가, 맑고 영롱한 마음이 호수처럼 가라앉는다.

꽃 잔디 소담스러이 피어 있는 길을 따라 가다 보니 범종 옆의 목단꽃이 봉오리를 터트려 화사히 웃고 색색의 들꽃은 지천으로 피어 나를 불러세운다. 나의 심안과 육안을 크게 열어야겠다. 오래오래 이 곳의 오월을 기억하고 담아두어야 할 것이니…….

고즈넉한 산사의 적막감이 처마 끝의 풍경 소리에 파문을 이루며 잔잔히 다가온다. 절 마당에 내려앉은 작은 산새 무엇에 놀랐는지 뽀료롱 날아간다.

예불 시간인가 보다. 잿빛 승복에 흰 고무신 단아한 비구니 돌계단을 내려서는데 먼지 한 올이 일지 않은 고요함이 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맑은 공기로 육신의 찌꺼기를 씻어내고 초록의 신비로 눈을 맑혔으며 승원의 맑은 염불 소리 억겁의 죄를 사하게 하였으니 영육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이제 오월 청풍을 맞으며 하산해야겠다.

내 귓전에 똑똑 또르르 목탁 소리 메아리친다. 내 이승의 삶이 오월 청풍같이 맑아지길 소원해 보면서…….

 

 

 

서명희

<계간 수필>로 등단(2001년). 계수회 회원.

‘뜰 아래채’ 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