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료작-

의자와 인형

                                                                                                   민명자

 얼마 전 일이었다. 밖이 소란스러워 내다보니 골목 막다른 집 남자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 집 앞에 헌 안락의자를 몰래 버리고 간 것이다. 양지바른 한옥 동네에 다가구 주택들이 들어서게 되면서부터 골목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고, 쓰레기 수거제도가 종량제로 바뀌게 되면서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도대체 누가 남의 집 앞에 자꾸 쓰레기를 갖다 버리느냐”는 고함 속에는 누구인지 모를, 쓰레기를 버린 사람에 대한 분노가 숨어 있었다. 의자는 낡긴 했어도 둥근 모양의 검은 가죽 시트와 등받이가 아주 폭신해 보였다.

의자의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버려진 의자의 주인을 상상하면서 지난번 설치미술전에서 본 의자들이 생각났다. 크거나 작고 또는 높고 낮은 갖가지 의자들의 자리는 거의 모두 비어 있었고, 허수아비를 앉힌 의자가 몇 개 배치되어 있었다. 허수아비가 앉아 있는 의자는 허상에 자리를 빼앗긴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게 했다.

고흐의 그림 ‘의자와 파이프’에는 의자에 사람 대신 파이프가 놓여 있다. 파이프는 인간의 흔적을 암시하며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무엇인가 늘 기다리며 사는 인간의 꿈과 그 꿈의 상실 같은 것, 빈자리만 남기고 떠나간 사람의 환영이거나 언젠가 돌아올 사람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들일지도 모른다. 파이프에서는 금방 담배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듯도 하고, 그러기에 의자는 곧 돌아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의자를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인간의 자리다. 따라서 의자는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의 신분과 권위를 대신하기도 한다. 용상이 만인지상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듯이, 회전의자는 부와 명예, 권위 같은 것들을 쉽게 연상하게 한다. 그런만큼 사람들은 대부분 좀더 높고 그럴 듯한 의자에 앉기를 꿈꾸며, 의자와 인간 사이에는 타협하기 어려운 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헤르만 헤세의 우화 『의자와의 대화』에서도 의자는 화가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지만 결국 둘 사이의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골목에 몰래 버려진 안락의자, 한때는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명상과 휴식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을 그 의자는 막다른 집 남자에 의해 골목 한가운데로 옮겨졌고, 여러 날 동안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의 발길에 채이며 눈총을 받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이번에는 공교롭게도 큰 고릴라 인형이 골목에 버려졌다. 누런 색의 몸체에 키가 거의 1미터는 됨직한 큰 인형이었다. 인형이 버려진 곳은 골목 입구의 두 번째 집 앞이었는데 그 집 주인의 대응 방식은 막다른 집 주인과는 대조적이었다. 고릴라 인형은 ‘이 쓰레기를 버린 사람은 빨리 치우시오.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라는 글이 쓰인 흰 종이 한 장을 목에 걸고 있었다. 인형과 양심이라는 글자의 묘한 부조화를 보며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실물처럼 잘 만든 인형이라 해도 그것에는 영혼이 없다는 점에서 인형의 비극은 시작된다. 그러나 인형은 또한 인간에 의해 영혼을 얻기도 한다. 액땜과 주술의 대상으로 나무나 흙이 인형으로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그것은 영혼적 존재로 인식되며 인간과 동일한 지위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인형은 인간 대신 역병疫病이나 재화災禍의 제물이 되거나 애완愛玩의 대상으로 헌신하며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왔지만 그 욕구가 사라지고 나면 버림을 받게 된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동그란 눈에 짙은 갈색 털을 가진 고릴라 인형, 그 인형 역시 아무렇게나 버려진 채 아직도 골목을 지키고 있다. 이젠 너덜너덜해진 경고장을 목에 걸고 비가 오는 날에도 푹 젖은 몸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이런 골목의 모습을 만약 S`교수님이 보신다면 무어라고 하실까.

교수님은 연구실을 찾는 학생들에게 늘 차를 대접하며 대화를 시작하셨다. 그런데 당신의 것으로 내놓는 찻잔을 보니 이가 빠져 있었다. 어느 날인가는 민망하기도 하고, 혹시 이가 빠진 사실을 모르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저, 이 잔은 이가 빠졌는데요” 했다. 교수님은 “이가 빠졌다고 내가 쓰던 물건을 함부로 버릴 수 있나요”라고 하셨다. 쓰던 물건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살아 갈 수야 없겠지만 사물에 대한 교수님의 따뜻한 시선과 애정이 지금도 큰 느낌으로 남아 있다.

그와는 달리 버려진 의자와 고릴라 인형, 골목의 풍경은 유인원을 통해 인간을 풍자한 영화 ‘혹성 탈출’의 장면들과 함수관계로 다가온다. 영화에서는 유인원들이 인간을 지배한다. 고릴라와 원숭이의 모습을 한 유인원들은 언어를 구사하고, 정치를 하고, 창조주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바친다. 그리고 인간은 유인원에 의해 하등동물 취급을 받으며 노예처럼 길들여진다. 유인원에게 인간은 영혼이 없는 존재로 인식되며, 따라서 어린이는 유인원의 애완동물로 거래되고, 아이가 자라서 애완용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진다. 인간의 자리를 유인원에게 내어 준 감독의, 인간의 미래에 대한 관점은 그만큼 비관적이다.

혹시 이 골목에서도 고릴라 인형이 인간의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나서게 되는 건 아닐지, 아무래도 의자와 인형의 거취去取를 챙겨 보아야겠다.

 

 

천료 소감

 

 

고단한 하루를 살면서도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수를 놓곤 하셨습니다. 순백의 천에 그려진 밑그림을 따라 팽팽한 수틀 안에서는 갖가지 꽃이 피어났습니다. 조용한 방안에 폭 폭 천을 찌르던 바늘 소리, 바늘 끝에서 새 생명을 달고 나온 나비들이 일렁이는 남폿불의 불꽃을 따라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언어의 바늘과 윤기 있는 삶이 한 땀씩 잘 채워져야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수필, 그 수폭에 밑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수필을 쓰는 일이 두려워지던 요즘, 제게는 큰 위안과 용기가 됩니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피어나던 새 생명들을 과연 저도 피워낼 수 있을지, 새로운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수필인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힘쓰겠습니다.

병환중에 계신 정봉구 선생님께 이 소식이 보람과 기쁨으로 전해지길 바라며 부디 쾌차하시기를 빕니다.

 

                                                                                                                               민명자

 

 

 

서울 출생.

충남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