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가게 앞에서

 

 

                                                                                          변해명

 

둥글고 예쁜 얼굴들, 서로 닮은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어우러져 드러내는 개성 있는 빛깔들, 소박하면서도 품위 있고 우아하면서도 그윽한 향기……. 나는 과일가게 앞을 지날 때면 과일들의 싱그러운 아름다움에 반해 걸음을 멈춘다. 꽃가게 앞에서는 느낄 수 없는 풍요로움과 넉넉한 행복감이다.

사과는 언제나 유혹의 눈짓으로 고개를 내민다. 배는 촐랑대지 않는 의젓한 모습으로 앉아 있고, 윤기 흐르는 귤들은 까르르 웃으며 우쭐대고, 성숙한 포도는 은근한 화음으로 얼굴들을 맞댄다. 소박하면서도 이국적인 참다래와 메론, 과일도 아니면서 언제나 과일 속에 자리잡고 있는 토마토, 철이 지났어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참외, 아직 자신의 빛을 드러내지 못한 채 서둘러 무대에 선 듯한 단감, 느긋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바나나, 이들 속에 오히려 당당한 오렌지, 사랑방 할아버지처럼 멀찍이 위엄을 갖추고 딴청을 떠는 수박……. 갖가지 모양과 빛깔로 어우러진 과일들은 바라만 보아도 눈이 부시고, 모두 맛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음성조차도 과일 향기가 묻어 날 것 같은 가게 주인에게 미소를 건네며 과일 앞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맨 먼저 사과를 집어든다. 붉고 매혹적인 홍옥은 아니지만 한 입 아작 깨물면 새콤한 사과 향기가 입안에 가득 고여날 것만 같다.

사과를 들여다보면 어린 시절로 달려가는 나를 만난다. 세검정 시냇가에서 먹던 능금 맛. 갓난아기 주먹보다 작은, 앙증맞은 능금 알을 손에 들고 아가의 볼처럼 발그스름하게 익은 쪽으로 아작 깨물었을 때의 그 새콤하던 맛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내 기억 속에서 처음 자리잡은 과일 맛이다. 원족(소풍)으로 먼 길을 간 아이들이 다리가 아파 울고 싶을 때, 능금 몇 알이 돌아오는 발걸음을 가볍게 했었다. 나는 지금도 사과를 보면 그 능금을 떠올리고, 그때 그 신맛의 기억으로 침이 고여난다. 그 능금이 지금은 어디에고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외가 앞마당에 서 있던 사과나무에는 홍옥이 빨갛게 익어 갔다. 옆에 배나무도 있었지만 내 시선은 언제나 사과나무에 묶여 있었다. 추수가 끝나고 감나무처럼 나무에 등불을 환히 밝히던 그 나무에서는 꽃필 때 향기보다 더 감미로운 향기를 품어내고 있었다.

올려다보면 따고 싶은 유혹을 억제할 수 없게 하던 원초적인 빨간색. 그 빨간색에 이끌려 가끔 오르지 못하는 나무 위를 기어오르려고 열중하던 때도 있었다. 만지면 붉은 물이 흠뻑 묻어날 것 같은, 단맛보다 신맛이 더 많았던 사과. 나는 지금도 사과는 홍옥이기를 고집한다.

다시 배를 집어든다.

보리울에서 돌이소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 위에 서낭처럼 돌배나무가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넘나들지 않는 고갯길이어서 평소에는 잘 다니지 않는 곳이지만 늦가을 돌배가 익을 무렵이면 아이들의 놀이터는 돌배나무 밑으로 옮겨지곤 했다. 아기 주먹만큼씩한 배는 익을 대로 익어 땅에 떨어지고 그 배를 주워먹는 맛은 꿀맛 같았다. 배나무를 향해 돌팔매를 날리는 아이도 없고, 욕심을 부리고 떨어진 배를 모두 가져가려는 아이들도 없었다. 다람쥐가 먹던 것은 놔두고 좋은 것 몇 알을 골라 먹고 놀다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돌배나무는 언제나 할아버지 품처럼 우리들을 품어 안았다. 수염을 만지면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 같은 즐거움과 행복이 있었다. 그 푸근하고 넉넉함처럼 배는 유혹하는 눈길로 우리를 들뜨게 하거나 먹고 싶은 충동으로 안달이 나게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도 나는 동심 속의 사과와 배를 좋아하지만 그와 더불어 다른 과일들도 사들고 오면 과일들이 뿜어내는 이야기가 좋아서 먹기보다 식탁 위에 놓고 바라보는 기쁨을 만끽한다.

과일은 풍요로움과 행복감을, 동심과 그리움과 추억과 감미로운 사랑을 지니게 하고 느끼게 한다.

우리의 삶이 어우러진 과일의 모습과 맛과 향기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나지 않고, 두드러지지 않고, 저마다 풍요로운 삶을 지니면서도 함께 행복할 수 있을 것인데…….

문학도 과일처럼 서로 다른 맛으로, 향기로, 몸짓으로 우리 앞에 놓여지는 것이 아닐까? 장르에 따라 빛과 향기가 다르게 다가오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취향으로 시詩든 수필이든 자신의 바구니에 담는 것인데,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다른 장르에 비해 우세하고 남이 좋아하는 것은 그에 미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사과와 배를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내가 사과를 좋아하고 배를 싫어한다고 누가 탓할 수 있을 것이며, 사과는 배보다 좋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과일을 고르며 나는 또 엉뚱한 생각으로 문학을 바구니에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