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

 

 

                                                                                              최병호

 

철새 하면, 멀다는 말부터 떠올려진다. ‘머-ㄹ고 먼-’이라는 할머니의 사실적인 설명이 지금도 귓전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그곳이 얼마나 먼 곳인지 가늠하지도 못하면서 그 어감이 주는 그리움 같은, 묘한 신비감에 빠지곤 했다.

철새는 이름 그대로 철 따라 삶의 터전을 옮겨가며 사는 새다. 여름 철새와 겨울 철새가 있다. 번식기엔 깊은 산에서 살다가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평지에서 사는 떠돌이 새가 있는가 하면 아예 이 땅엔 발도 딛지 않는 채 지나가기만 하는 나그네 철새도 있다.

따뜻한 햇볕을 물고 온 대표적인 철새는 아무래도 제비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그것은 곧 희망이었다. ‘흥부의 행운’이 우리 집에도 꼭 심어질 것 같아서다. 나는 신준이 아재를 졸라서 제비집 밑에 받쳤던 판자를 잊지 않고 다시 손보게 했다.

언젠가 제비가 돌아오지 않은 해가 있었다. 신준이 아재가 “그 제비, 갈 때 아니면 올 때 죽은 거다”라고 말했다. 나는 “아니야, 머슴이 그런 걸 어찌 알아?” 하고 반격했다. “호야, 내가 네 아쉴 땐 아재고, 아닐 땐 머슴이냐?” 하고 신준이 아재가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 시비는 결국 “아재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나의 일방적인 양보로 일단락되었다.

아재는 바로 남새밭 가에 작은 구덕을 하나 파라고 지시했다. 복종할 수밖에. 뒤따라온 아재는 이내 이상한 뭉치를 하나 그 속에 던지더니 묻으라고 했다. “제사를 지내야 할 것 아니냐. 제비 시신이 없으니 그 집이라도 묻고… 아재 하라는 대로 해! 절 두 번 해.” 나는 어리둥절한 가운데 큰절을 했다. “제비야 저승에서도 잘 살아라. 좋은 일 한 사람 보물 박씨 잘 물어다 주고…….” 그런 축도 따라 외고 또 절을 했다. 당연히 내년엔 우리 집에 ‘보물 박씨’가 꼭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제비는 이른 봄, 먼 남쪽에서 날아와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까고 길러서 가을이 되면 겨울을 나기 위해 다시 남쪽으로 가는 철새다. 어쩌면 작고 날렵한 그 몸매로 그리도 먼 곳을 해마다 오고갈 수 있는지 참으로 신묘하고 위대하게 보였다.

제비와 더불어 잊을 수 없는 새가 뻐꾸기다. ‘뻐꾹 뻐꾹 뻐꾹…’ 시인들의 귀를 그처럼 곤두세운 소리도 흔치 않을 것이다. 처량하기도 하고, 그윽하기도 하고, 평화롭기도 하고, 정겹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한스럽기도 하고…….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 온갖 이미지로 부각되는 뻐꾸기 소리는 과연 시적 상상의 보고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뻐꾸기에 대해선 뻑꾹 뻑꾹 하는 그 소리 외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한번도 실물을 본 일이 없다. 그림으론 보았을지 모르나 그것도 기억엔 없다. 그러나 그 소리만은 지금도 내 고향의 여러 산길들을 헤매게 한다. 산자락을 감고 도는 두렁길을 추상追想하게 한다.

신준이 아재를 따라 산에 갔을 때의 일이다. 문득 뻐꾸기 소리가 들려왔다. 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푸른 숲을 조용히 두들겼다. 뒤에서 미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앞에서 끄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니 양 옆에서 번갈아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멀리서 아니 가까이서 들려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변주를 무엇이라 하랴. 신준이 아재는 “내내 너만 따라 다닐 것이다” 하고 웃었다.

겨울 철새 얘길 잠깐 하지 않을 수 없다. 낙동강 하구를 비롯한 이 땅의 여러 도래지渡來地엔 때가 되면 오리, 기러기, 두루미 등이 떼지어 날아든다. 비교적 날씨가 고르고 먹이도 풍부한 때문이다. 그들은 새끼들과 함께 찬바람, 눈보라를 업고 이 먼 곳을 찾아온 것이다. 활동 공간이 아무래도 제한되어서인지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대로 훌륭한 볼거리였다.

살을 에는 찬바람 속에 물 위와 하늘을 박차고 오르내리면서 휘갈기는 그 장엄한 그림! 함박눈 내리는 하구의 갈대 숲 언저리에 삼삼오오 의연히 늘어선 그 거대한 정물화! 바로 신의 ‘행위 미술’이고 ‘설치 미술’이 아니던가. 카메라가 달려오고 기자가 쫓아오고 화가와 시인이, 아니 자연을 사랑하는 보통사람들이 줄줄이 달음박질이니 그 정경을 어떻다고 하랴. 그대로 ‘겨울 예술’의 정화라 할 것이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계절도 때가 되면 역시 ‘철내기들’이 웅성거린다. 신문이나 TV에서는 특히 철내기 정치인들의 소식을 자주 팔아댄다. 깔끔하게 ‘철새 정치가’란 이름으로. 철새 정치가라……. 철새 같은 정치가란 뜻일 테지. 그 관형사가 과연 온당한 것일까?

철새 정치가란 정치 환절기에 이 당에서 저 당으로, 저 파에서 이 파로 그 터전을 옮기는 족속들을 말한다. 터전을 옮긴다는 점에선 철새와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그 동기와 그 과정은 전혀 다르다. 옮긴 후의 모습도 견줄 거리가 아니다. 아무래도 적절치 못한 수식어 같다.

말 잘하는 말 장사들이 예우한 수식어일 터이지만 아마도 조류학자들은 그걸 반식자우환(半識者憂患)쯤으로 여길 것이다. 이들을 지칭하는 또 다른 ‘태양족’이란 말도 천문학자들은 같은 심정에서 웃을 것이다.

나는 철새를 사랑한다. 번식을 위한, 새끼들을 위한 보다 좋은 환경을 찾아 험난을 무릅쓰고 불원만리(不遠萬里) 하늘을 가르는 그 생명력을 나는 찬탄한다. 다채로운 목소리로, 줄기찬 활동으로, 다양한 날갯짓으로 우리에게 큰 위안을 주며 상상을 부추겨 예심(藝心)을 샘솟게 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나는 마냥 즐기고 싶다.

철새는 결코 변절의 상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