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리나무 숲을 지나

 

         

                                                                                          구양근

 

일요일 점심때가 가까이 오자 산을 오르고 싶었다.

어제 아내의 삭망을 지내고 남은 사과 하나와 밤, 대추 몇 알만 비닐 봉지에 넣고 작은 배낭을 멨다. 도봉산 밑 상점에서 김밥 하나와 생수를 추가시켰다. 가격은 커피 한 잔 값도 안 된다.

얼마만의 외출인가. 아내가 세상을 뜨고 첫 외출다운 외출인가 보다. 가슴을 펴자,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하면서도 자꾸만 움추려들고 작아지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약한 사람이었던가. 어린 아들딸보다도 어른이라는 내가 가장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혼자의 등산이니 빨리 걸을 필요도 없고, 누구와 보조를 맞출 필요도 없다. 한참을 걸으니 맑은 골짝 물이 흐른다. 마침 점심때가 되었는지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고 도시락을 펴고 있다. 나도 골짝을 따라 올라가다가 괜찮은 자리를 하나 잡았다. 등산화를 벗고 양말도 벗고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발을 물에 담구었다. 거울처럼 맑은 물이 깨지며 내 하얀 발을 간지럽힌다. 얼마나 하고 싶던 족탁이었던가. 전에는 등산을 가도 일행이 있기 때문에 남들이 하지 않는 족탁을 나 혼자만 할 수 없어서 언제나 지나치며 아쉬워했던 일이다.

어떤 젊은 부부가 가까이 오더니 바로 내 앞에서 짐을 푼다. 나 정도에게는 별 존재의식을 느끼지 않고 편안한 상대로 느껴지나 보다. 역시 신발을 벗고 물로 들어온다. 나의 매섭던 눈초리는 어디로 갔는지. 독사처럼 쏘아보는 내 눈에 질렸다는 말도 여러 차례 들었는데 이제는 나 정도는 부담없는 상대로 보이나 보다.

다시 길을 따라 오르다 도봉산 바위 절벽이 가장 잘 보이는 건너편 바위 위에서 또 휴식을 취하였다. 절벽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개미새끼처럼 바위에 붙어 밧줄 타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란 참 희한한 동물이다. 무엇 때문에 저 고생을 하며 저기를 오르려고 기를 쓸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아예 신문지를 깔고 드러누웠다. 점심을 먹은 식곤증과 약간의 피로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나는 그 잠깐 동안의 오수에도 아내를 만나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등산객의 소리에 잠이 깨었다.

상봉에서는 위험한 길은 피하고 안전한 길만 택했다. 그러나 신선대만은 꼭 오르고 싶었다. 신선대에 올라 길게 이어지는 산골짜기 한쪽과 사람들이 사는 서울 시내 한쪽을 번갈아 보며 파란 하늘에 흩어지는 흰구름을 만져보았다. 인생이 별것도 아닌 것을…….

나는 이전부터 등산하며 또 꼭 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 전혀 모르는 길을 마음껏 걷고 싶은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산길을 혼자 활개를 치고 솔잎을 씹으며 걷고 싶었고, ‘나그네 설움’을 구성지게 불러보고도 싶었다. 그리고 또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야호!’ 대신에 ‘구!’를 목청껏 외쳐보고 싶었다.

시골 우리 집의 암호가 ‘구!’였다. 어머니가 출타하셨다가 늦어지면 우리는 마중을 나갔다. 넘어올 고개를 향하여 “구!” 하고 길게 내뿜으면 캄캄한 산골짜기에서 응답하는 “구!”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좋아서 “엄니다!” 하고 날뛰었다. 또 내가 대처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토요일 저녁에 산길을 넘어오면 어머니와 누나들이 내가 오는 산길을 향하여 “구!” 하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 미칠 듯이 좋아서 “구!”를 연발하였다. 그때 누나의 말로는 다른 말로 소리를 지르면 도깨비가 따라 하기 때문에 ‘구!’라고 해야 한단다. 도깨비가 유일하게 따라 하지 못하는 말이 ‘구!’라고 했다. 그런데 이 암호는 다른 사람이 쓰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사실은 우리 집만 쓰는 고유의 암호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한번은 어려운 일을 당할 뻔한 적도 있다.

그날도 장에 갔다 늦게 오시는 어머니를 마중나갔다가 동구 밖에서 “구!”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는 6·25 직후인지라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전경戰警이 누나와 나를 따라오라 하였다. 그리고는 방금 암호가 무슨 뜻이냐며 이실직고以實直告하라고 하였다. 어떻게 하여 겨우 그 전경의 오해는 풀었지만 하마터면 빨치산과 내통하는 사람으로 오해받을 뻔한 것이다.

나는 서남쪽 어느 모르는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드디어 목청껏 “구!” 하고 소리를 질러보았다. 내 목소리가 고향 산천을 울리는 것 같아 모든 직성이 다 풀렸다. 그러나 ‘나그네 설움’은 부르지 못했다. 다음 번에는 기어코 청승맞은 유행가를 한 곡조 뽑아야지.

다시 한참을 내려오는데 누군가가 장난기 어리게 내 머리를 무엇인가로 탁 때리는 것 같았다. 마치 아내가 뒤에서 장난을 치는 것 같아서 획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다. 나는 내 모자에 맞아서 숲으로 떨어지는 물건을 보았다. 다름 아닌 도토리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상수리나무 숲을 지나고 있었다. 온통 끝없는 키 큰 상수리나무 천지였다. 도토리가 떨어져 낙옆 사이로 구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하모니를 이루었다. “탁 파사삭! 탁 파사삭!” 하는 소리는 앞에서도 뒤에서도 이쪽 저쪽에서도 심심찮게 이어졌다. 나는 오랫동안 서서 그 소리를 감상하였다.

또 다시 한참을 내려오니 골짜기의 물 소리가 들린다. 위쪽에서는 물줄기가 너무 작아 아무 소리도 없이 바위 사이를 흐르다가 중간쯤 내려오면 그것들이 합쳐져 소리가 날 정도로 물줄기가 생긴다. 나는 다시 개울가에서 쉬기로 하였다. 얼굴도 씻고 물을 마시기도 하면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석양의 산 속에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밑을 내려다보니 맑은 물 위에 파란 하늘 한 자락이 떨어져 있다. 나는 거기에 비추이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분명 초로의 까칠한 한 남자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