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눈물차

 

 

                                                                                      이혜연

 

가을로 가는 언저리 어디쯤일까, 사르비아 꽃빛이 붉다.

경비 아저씨가 화단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뭘 하고 계셔요?”

“받을 꽃씨가 없나 해서요. 요즘은 매일 꽃씨를 받거든요.”

봄이 오면서부터 아저씨는 내내 바빴다. 덩치 큰 정원수들 사이 자투리땅에 꽃씨를 뿌렸다. 코스모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백일홍, 분꽃……. 아파트에 심어진 나무들이래야 뻔한 것들이다. 봄이 무르익어 가면서 그 단조로운 그림들에 아저씨의 꽃씨들은 알록달록 색의 조화를 부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저씨는 화단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보도블록 틈새를 따라 채송화 씨를 뿌렸다. 파스텔 빛깔의 채송화들이 줄지어 피어 있던 고향집 토방 밑을 떠올리며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들고 날 때마다 유심히 살피는 나를 지켜보았는지 아저씨가 다가왔다.

“어째 시원치 않네요.”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새싹은 어렵사리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자라는 모양이 역시 시원치 않았다. 보도블록 틈새라 거름도 줄 수 없다며 시무룩해 하던 아저씨는 며칠 후 활짝 핀 채송화 분 너덧 개를 화단에 가져다 놓았다. 하루하루 화분의 숫자는 늘어갔다. 앞 동과 키 큰 나무들에 가려 반 그늘일 수밖에 없는 땅에서 자란 꽃나무들은 파리했다. 그래서 아저씨는 대신 집 마당에서 튼실하게 자란 것들을 화분에 담아 가져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투리땅에서, 보도블록 틈새에서, 화분 속에서 화초들은 나름대로 끊임없이 꽃을 피웠고, 벌과 나비들의 행보도 바빠졌다. 그리고 가을의 초입인 지금, 소명을 다한 꽃들이 지고 난 자리에 대신 씨앗들이 맺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꽃씨들은 이제 아저씨가 마련해 놓은 종이봉투 속에서 돌아올 봄을 꿈꾸며 편안한 휴식에 들어갈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농어촌 소식을 전하는 프로그램을 보던 중이었다. 꽃차를 소개하겠다며 리포터는 생활한복을 맵시 있게 차려 입은 젊은 아낙을 따라나섰다. 먼저 그들이 멈춰 선 곳은 연꽃들로 가득 찬 연못가였다. 활짝 핀 연꽃을 따려 드는 리포터를 만류하며 아낙은 뜰채를 연잎들 사이로 깊숙이 밀어넣었다. 그러더니 피지도 않은 꽃봉오리를 댕강댕강 잘라 담았다. 꽃봉오리가 뚝뚝 잘려 나갈 때마다 내 가슴에서도 무언가가 뚝뚝 부러져 나가는 것 같았다.

산으로 들로 다니며 바구니 가득 꽃을 채운 두 여인은 마을로 돌아왔다. 서늘한 정자에 앉아 아낙은 꽃차를 만들어 리포터에게 권했다. 사발 만한 질그릇 찻잔 속에서 꽃봉오리는 활짝 꽃을 피웠다. 탄성을 지르는 리포터에게 아낙은 속삭이듯 말했다.

“꽃의 눈물차예요.”

지는 것이 서러워 흘리는 꽃의 눈물이라는 것이다. 낭만을 이야기하는 아낙의 단아한 모습에서 나는 언뜻 잔인함을 읽었다. 그냥 지는 것도 서러울진대 하물며 피지도 못한 채 꺾인 꽃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그는 알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절화折花가 싫어졌다. 예전에도 그리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손에서 혹은 비좁은 그릇 속에서 시난고난 피다 시들어가는 모습이 안쓰러워서였다. 그래도 더러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무심결에 꺾으러 들었고, 삭막한 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좋아하는 꽃을 골라 사들고 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꺾은 꽃보다는 화분이 좋고, 그보다는 핀 자리에 그냥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이 훨씬 좋다. 나와 더불어 한세상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라는 의식이 강해졌다고나 할까. 될 수 있으면 온전히 그 삶을 지켜주고 싶은 것이다.

꽃가루받이를 해줄 새를 유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한 열대꽃의 삶을 보면서 울컥 목이 메어왔다. 그리고 새삼 꽃의 향기나 아름다움이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것이 열매를 남기기 위한, 그래서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임을 안다면 어떻게 감히 꽃을 꺾어 찻잔에 띄우고 낭만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차라리 혹여 시든 꽃을 보거든 수고했다 쓸어주며 꽃씨라도 품어올 일이다.

하지만 그 아낙을 비난해 무엇하랴. 어쩌면 우리는 모든 생명체들의 눈물을 먹고 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동물에 한한 얘기가 아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가까이 오면 두려움에 식물도 바들바들 떠는 것을 파장으로 감지했다는 생물학자의 말을 빌어본다면 채소를 거두는 순간 그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세상살이에는 먹이사슬이라는 것이 있다.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 먹이사슬에 의해 세상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 한다. 꽃의 눈물차를 마시는 낭만이 즐거움을 주어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라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굳이 강자의 횡포로 얻은 낭만으로 내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꽃씨를 받아드릴까요?”

등 뒤에서 경비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도 아파트 사람들의 무관심 덕분으로 화단의 풀꽃들은 온전히 소임을 다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더러 씨앗을 맺지 못한 채 지는 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꽃이 흘리는 눈물은 적어도 찻잔 속에 담긴 꽃이 흘리는 눈물과 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혜연

<수필공원>으로 등단. 약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