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김병권

 

‘당신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식들이 다 외국에 나가 있고 저마저 떠나온 빈 집에서 혼자 생일을 맞게 되었으니… 아침이나 제대로 챙겨 드셨는지, 궁금하고 또 안쓰러운 마음 금할 수 없군요.’

 

이렇게 시작한 아내의 편지는 그 동안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살가운 정을 듬뿍 담아 내 심금을 울린다. 나이가 들면 부부의 정도 새로워지는 것일까……. 오랜 세월을 함께 살다 보면 굳이 말이 없더라도 무언의 교감이 이루어지게 마련이지만 이렇게나마 편지를 받고 보니 새삼스럽게 애틋한 정감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그것은 단순히 헤어져 있는 사람끼리 궁금했던 소식을 교환한다는 차원을 넘어 까마득한 추억의 동산으로 단숨에 달음박질치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결혼 전 줄곧 일선에서 근무했다. 6·25 전쟁 중에 군에 투신하여 격전기(激戰期)와 휴전 이후 상당 기간까지 전방에 있었으니 가족 친지 간의 안부는 의당 편지가 대행했다. 편지를 보내고 답신을 받기까지는 보통 두 달이 걸리지만 그래도 그것을 믿고 기다리는 재미는 보통이 아니었다. 아마 내 생애를 통해 편지에 대한 고마움을 가장 절실하게 느껴 본 일은 그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래서일까… 나는 편지를 좋아한다. 받는 것도 좋아하지만 쓰는 것도 무척 즐긴다.

 

1952년 7월의 일이었다. 동부 전선 최전방 소대장이었던 나는 군단 작전 명령에 따른 주공대대(主攻大隊)의 말단 지휘관으로 339 고지 공격에 참전했다. 그러나 전쟁은 상대가 있는 법, 공격한다고 다 이길 수는 없는 일이다. 피아의 포격으로 극심한 인명 손실을 입게 된 우리 대대는 끝내 고지 점령을 포기한 채 퇴각하게 되었다. 이 일 때문에 대대장은 군법회의(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강등 처분을 받았다. 즉 중령 계급이 소령으로 내려가면서 보직도 박탈되었던 것이다.

이때 나는 대퇴부에 부상을 입고 야전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대대장의 처지가 너무 안쓰러워 위로의 편지를 썼다.

‘작전 실패의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들(소대장, 중대장)이 져야 하는 것인데 애꿎게 대대장 혼자만 처벌을 받게 되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대충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진심의 토로였다.

그 후 나는 두 달 만에 완치되어 다른 부대로 배치되었다가, 휴전 직전의 급박한 상황 때문에 다시 옛 부대로 복귀 명령을 받았다. 신고를 마치면 바로 전방 중대장으로 나가 전투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 절차를 밝기 위해 우선 인사참모실로 찾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때 우리 대대장이었던 L 중령이 인사참모와 같은 천막에 있지 않는가.

“야! 자네 살아 있었구먼. 지금 어디 있나?”

“오늘 막 전입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그래, 그럼 잘 됐네. 지금 전방이 무너져서 위급 상황이니 당분간 나와 같이 있도록 하세.”

“저는 중대장 요원으로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니 괜찮아. 내가 인사참모에게 말해서 정정하면 되니까.”

 

그러면서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내 손을 잡아끌면서 인사참모에게 갔다.

“박 중령! 여기 있는 김 중위는 내가 가장 아끼는 장교인데,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내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좌절하고 있을 때, 나에게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꾸준히 보내준 잊을 수 없는 전우지. 그뿐이 아니야. 저 부산에 있는 육군병원으로 후송되는 것도 마다하고 전우의 원수를 갚겠다고 원대 복귀를 자원한 모범장교이지……. 그러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말고 어서 내 부서로 발령해 주게.”

 

이렇게 해서 5사단 사령부 군수처로 보임된 것이 53년 6월 15일이었고 그로부터 한 달 12일 만에 휴전이 되었다. 단순히 시간상으로만 따진다면 3년 여의 전쟁 기간 중, 한 달 간의 의미는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육이오 한국전쟁을 통해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이 기간 중에 있었음을 상기하면 그때 나로 하여금 사단 사령부에 근무토록 배려해 준 L 중령은 내 생명의 은인임에 틀림없다.

휴전 직후의 어느 날, 포화가 멎은 전야에서 함께 전입한 20명의 장교들을 일일이 확인해 보았더니 단 두 사람만이 생존해 있었다. 가히 그 시절의 전황(戰況)이 얼마나 처절했고, 내 생명 역시 얼마나 끈질긴 것인가를 입증해 주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때 야전병원에서 보낸 나의 편지가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받은 편지여서 그때까지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설사 애인한테서 온 편지라도 보관하기가 어려웠는데, 하물며 내 편지 따위를 보관하다니… 나는 곧이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북한에서 월남한 독신이고, 또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설마 그러랴싶어 반신반의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포성이 잠든 한적한 밤, 조그만 야전 천막 안에서 우리 둘은 술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문을 연 그는 그 간에 겪었던 묵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때 전투 실패 죄에 대한 최종 심리 과정에서, 내 편지가 정상 참작의 입증 자료가 되어 원 계급 복귀가 수월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는 그것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두 눈 가득히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감정의 전이 탓일까. 나도 덩달아 글썽거렸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아내의 편지를 통해, 반세기 전의 일을 회상하는 일이 조금은 계면쩍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편지로 엮어간 5년의 세월이 영글어 결혼을 하게 됐고, 월남 전선에 있던 2년 여 동안에도 매일같이 편지를 교환했으니, 어쩌면 우리는 편지 커플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편지를 일컬어 사랑의 저장고라 부르고 있다. 언제든지 사랑의 갈증을 느낄 때 꺼내보면 바로 목축임을 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