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뒤마

 

 

                                                                                      고봉진

 

초등학교 5학년 때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김래성이 번안한 소설 "진주탑"을 통해서 처음 읽었었다. 어린이 잡지나 이야기책을 서로 교환해 읽던 한 반 친구가 가끔 자기 아버지 서가에서 소설책을 골라 와서 수업 시간에 읽기도 하고, 나에게 빌려주기도 했었는데, 그 책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때만 해도 우리 나라에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완역이 없었고, 어린이를 위해 쉽게 간추린 책도 출간되기 전이었다.

"진주탑"은 이야기 무대를 19세기 프랑스에서 20세기의 우리 나라로 무리하게 옮긴 것이었다. 에드몽 당테스라는 주인공이 이봉룡으로, 마르세유가 진남포로, 엘바 섬의 나폴레옹이 상해에 망명해 있던 안창호 선생이라는 식으로 옮겨져 있었고, 이봉룡의 변신인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백진주 선생이란 여자 같은 이상한 이름의 신사로 등장한다.

상, 하 두 권으로 된 그 소설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그랬던지 그 후 얼마 동안 잠이 들면 그 소설 속의 여러 가지 극적인 장면들이 자신이 겪는 일로 꿈에 나타나곤 했었다. 특히 지옥 같은 감옥 섬에서 탈출을 하기 위해 죽은 사람 대신 자루 속에 들어가 바다로 떨어지는 장면에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 보니 식은땀이 흠뻑 흘러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 뒤에 어린이에게 인기 있는 그의 다른 소설 "삼총사"도 읽었고, 원작을 제대로 번역한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그때마다 뒤마의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당하여, 그의 화술이 어느 때는 너무 장황하고 지나칠 정도로 수다스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있어도 괜찮을까 하고 감탄을 거듭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소설을 흔히 ‘대중소설’로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아, 젊었을 때는 플로베르나 앙드레 말로니 하는 사람들의 작품보다 그의 소설에 더 재미를 느끼고 있는 자신이 고차원적인 문학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속물이 아닐까 하고  은근히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뒤마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문필가가 되었다고 한다. 깊은 학문적 교양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비평적 정신과 정확한 역사학적 고증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오히려 번거로운 회의주의나 상대주의에 빠지는 법이 없다. 언제나 단순 명쾌한 논리로 전개되어 대중의 갈채를 받았다. 그의 소설 가운데는 쾌활하고 남성적이고 유머가 풍부한 호걸들이 나와서 결단력이 뛰어난 활동을 한다. "삼총사"도 그러하지만 특히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그러한 것들 중의 압권이다.

몇 달 전 외신에서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묘지를 그의 탄신 200주년이 되는 금년, 그의 고향에서 프랑스의 위인들을 모시는 파리의 팡테옹(panthén)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했다는 뉴스를 전했다. 시라크가 중임에 도전을 하고 그 선거가 임박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최근 새로 인기가 높아가고 있는 그의 작품을 애호하는 사람들, 주로 우파 성향의 유권자들을 겨냥한 선거 전략의 하나로 정치적인 해석을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뒤마와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살며 함께 작가로 활동했던 빅토르 위고는 죽자마자 팡테옹에 묻혔는데, 뒤마는 100년이 훨씬 넘어서야 겨우 그곳으로 옮겨 묻혀지게 된 것이다. 두 문호의 죽음에 대한 국가의 예우가 이처럼 달랐던 것은, 애초부터 그들이 사망했을 때의 정치적 상황에 번롱(飜弄)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뒤마가 사망했을 때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참패를 하고 나폴레옹 3세 제정이 막 붕괴되었던 극히 불안정한 시기였다. 극심한 혼란기에 제정의 뒤를 이어 들어선 당시의 공화정부가 열렬한 제정 지지자였던 뒤마의 죽음에 냉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위고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항거해서 해외로 망명을 하여 19년간 저항을 계속한 공화주의자였다. 그가 임종을 한 때는 제정이 무너지고 15년이 지난 뒤라 안정된 공화 정부가 국장으로 그를 팡테옹에 모신 것은 납득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그러나 오늘까지 그들에 대한 차별이 지속되어 온 것은 두 사람이 지닌 문학의 질적 차이에서도 왔다고 볼 수도 있다. 위고는 "미제라블" 같은 장편 소설도 남겼지만, 문학사적으로는 로맨티시즘의 시를 개척한 위대한 시인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에 뒤마는 장편 소설을 주로 신문에 연재한 작가였다. 대중 매체를 통해 활동한 그는 생전에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모으고, 그 덕에 한때 엄청난 부도 축적했었다지만, 따져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꾼’ 이상은 아니었다.

요즘 와서는 세계적으로 TV, 영화와 같은 대중 매체가 생활 속에 차지하는 비중이 자꾸 늘어가는 탓인지, 문학 작품에 대한 평가 기준도 상당히 달라지고 있다. 어떤 작가를 평가할 때 사회의 엘리트층이 중시하는 그 문학성에도 주목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널리 읽고 즐기고 있느냐 하는 그 ‘대중성’에도 높은 비중을 두어가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위대한 작품은 가장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사랑을 받는 것이란 평범하고 오래 된 등식이 더욱 공감을 얻어가고 통용되어 가는 추세다. 이번 뒤마의 묘지 이장 결정은 그러한 흐름의 일단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의 작품 자체가 그 ‘대중성’, ‘통속성’ 때문에 늦게나마 오히려 새롭게 높은 평가를 받은 것 같아 그의 오랜 애독자로서 다행스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